한국일보

복음 이야기 - 꿈에서 체험한 지옥

2010-06-16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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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쿵!’ 갑자기 육중한 철문을 닫는 소리가 내 귀에 들렸다. 짙은 암흑 가운데서도 머리 위로 길게 나선형 계단이 나 있는 것을 보았다. 그 끝에 쇠창살이 달린 철문이 보였다. 그 순간 내 마음 깊숙이 참담한 절망감이 밀려들었다. ‘아, 이제 다시는 저 철문 바깥으로 나갈 수 없구나. 나는 영원히 기회를 잃었구나….’ 마치 천근만근 무게의 쇠고랑이 내 손발과 어깨를 꽉 옭아맨 듯했다. 아주 생생한 꿈을 통해 내가 체험한 지옥이다.

한증막보다 수천 배나 더 후끈할 불못의 뜨거움. 예수님은 “거기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사람마다 불로써 소금 치듯 함을 받으리라”(막 9:48-49)고 경고하셨다. 신약성경에 모두 14번 나오는 지옥 경고 중 11번을 예수님이 전하셨다. 지옥 불못을 휴머니즘 시대 분위기에 타협하느라 적당히 희석시키면 안 된다. 누구도 예수님보다 더 자비로울 수 없다.

지옥에서는 마취가 풀린 듯한 양심의 고통도 크다. 사람은 죄를 지을 때마다 양심의 가책을 느끼거나 합리화한다.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고발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롬 2:15). 죄책감에 늘상 시달린다면 제대로 살아가기 어렵다. 그래서 최후심판 전까지 망각의 은총이 허락된다. 심판 후에는 반복된 죄로 둔해진 양심의 촉수가 혓바늘 돋듯 다 깨어 일어난다.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는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롬 2:9). 지상생활의 회고도 고통스럽다. 이전에 마음껏 즐기던 밝고 화창한 햇빛을 더 이상 볼 수 없다. 시원한 물 한 잔이 기억은 나는데 단 한 방울도 입에 댈 수 없다(눅 16:24). 지상에서 놓쳐버린 구원의 기회 역시 두고두고 회한으로 남는다.


그러나 짐작컨대 지옥에서 가장 큰 고통이 있다. 자신의 고통이 영원히 계속된다는 또렷한 의식이다. 언젠가 끝난다는 기약이 있다면 수억조 년이라도 그 때를 기다리며 고통을 참아낼 수 있다. 그러나 단테가 ‘신곡’에서 지옥 입구에 남긴 팻말은 지금도 유효하다. “여기 한 번 발 내디딘 자는 되돌아 나갈 희망을 완전히 버려라!”

인간이 70,80년 동안 지은 죄를 빌미로 영벌을 내리는 게 과연 정당한가. 성경적으로 형벌의 경중은 죄의 양보다 질에 달려 있다. 모든 죄는 지극히 거룩하신 우주의 주권자를 거역하고 그분의 형상과 영광을 훼손하는 것이다. 그래서 단 한 번 화를 내거나 거짓말한 불법의 죄질도 영원히 형벌받기에 충분하다.

도덕성은 인격의 본질이다. 사람의 모든 죄는 철저히 인격적이며, 형벌 또한 그 사람의 의식과 몸에 주어지는 구체적인 고통이다. 최후심판 날에 모든 사람은 영생불사의 몸으로 다 되살아난다. ‘바다가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고’(계 20:13). ‘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 그들의 시체들은 일어나리이다’(사 26:19). 사람이 시간 속에서 생일, 곧 끝 모를 영원의 출발점을 가진다는 건 사실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국민이 국법을 위반하면 경찰에 붙잡힌다. 철창에 갇힌 후 “나는 그런 법이 있는 줄 몰랐다”고 하소연해 봐야 소용없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신적인 진노는 누구도 온전히 이해 못한다. 성경에 제시된 그분의 해법을 따르는 길만이 그 진노를 비껴 나갈 안전한 법망이자 가장 적법한 탈출구다.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마 25:46).


안환균 / 사랑의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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