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선교하는 삶 - 간절함을 생각함

2010-05-17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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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는 나와 오랫동안 편지를 나누고 있는 한인 무기수 형제이다. 100년형을 받았는데 지금 나이가 30세이니 살아 있는 동안 그가 담 밖에 나와 볼 기회는 없을 것 같다. A는 12세 때 미국 가정에 입양되었다. 불의의 사고로 양부모를 잃자마자 16세에 가출, 거리의 소년이 되었다.

A에게는 가족이 없다. 양부모의 부모, 즉 A의 미국인 할아버지, 할머니도 세상을 떠났고 양부모의 친자식들도 A를 찾지 않으니 그는 태어났을 때처럼 다시 혼자이다. A를 처음 만났을 때 100년 형기 가운데 10년이 지나갔다고 했다. 체념을 하고 살리라 하였지만 속으로는 한 해, 두 해… 세월이 가는 것을 세어 본다고 나에게 말한다.

우리는 한 달에 두어 통씩 편지를 주고받는다. 담 안에서 만난 친구들에 관해 이야기하고, 최근 읽은 한국 소설에 관해 이야기한다. 교도소 안에서 어렵사리 얻은 일자리와 그 일의 숨 막히는 단순성과 반복성, 그리고 120도를 넘는, 사막 한가운데 뜨거운 햇빛 아래서 일해야 하는 힘든 조건에 관해 이야기하고 하루 종일 일해서 버는 2~3달러를 모았다가 꼭 필요한 우표도 사고 나에게 보낼 생일 카드를 산다는 이야기도 한다.


나는 A에게 잊혀져 가는, 그리고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세상 기억으로 향한 작은 창문이다. 그는 늘 나의 편지를 기다린다. 나는 가족 이야기를 한다. A가 기억할 수 있는 가장 어린 시절도 고아원에서 출발한다. 입양 후, 가족이라는 것을 잠깐 가져보았지만 그다지 떠올리고 싶은 기억은 아니었다고 말한다. 자기가 꿈꾸는 가족이라는 단어는 언제나 따뜻한 음식과 웃음소리와 함께 떠오른다고 한다. 어린 시절부터 그토록 가져보기 원했던 가정을 A가 살아 있을 동안 이루어 볼 수는 없다.

나는 그가 사건을 저질렀을 당시 살았던 LA가 그동안 어떻게 바뀌었는지 이야기하고 내가 걷는 그리피스 산길의 봄 풍경에 대해 이야기한다. 눈앞에 보이는 것은 시멘트와 철창으로 이어진 회색공간이지만 A는 머릿속으로 호젓한 산길과 봄기운에 관해 상상을 할 수 있고 그것은 내가 아침마다 피부로 경험하는 것보다 오히려 더 짙고 강렬하며 완벽하다.

최근 몇 달 째 내가 보내는 편지가 전달되지 않는다. 왜 그런지 아무도 대답해 줄 수가 없다. A는 처음에는 나의 편지를 기다렸고, 무슨 일이 생겼나 걱정을 했고, 그러나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현실에 화가 났고, 지금도 날마다 편지 전해주는 간수가 자기 이름을 부르지 않나 하고 가슴 조이며 기다린다 했다. 그리고 A는 덧붙였다. “이제 아무에게서도 편지가 오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미칠 것 같아요. 희망이 없다는 것이 사람을 죽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에게서 편지를 기다리는 희망마저 가져가시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새벽 묵상시간에는 A의 간절함을 떠올린다. 그리고 한편 나에게는 ‘그분’을 향한 그런 간절함이 있었는지 생각해 본다. 시냇물을 찾아 헤매는 사슴의 간절함이 과연 있었던가? 대답은 아니다. ‘그분’의 응답을 구한다 하면서도 그까짓 편지 하나를 기다리는 A의 간절함에도 미치지 못하였다. ‘그분’은 머리 숙인 나에게 이렇게 말씀을 걸어오셨다. ‘네가 여러 번 편지를 보내도 그가 못 받았다 할 때 너의 마음은 어떠했는가? 내가 너에게 보내는 사랑도 부디… 배달사고 없이 잘 받아볼 수 있기를 바란다.’


김 범 수(치과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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