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삶 속의 부처 - 친애하는 그대에게-

2010-05-10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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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여! “그대 자신을 알라.” 일설에는, 이 아름답고 영원히 썩지 아니할 준엄한 금언은 고대 아테네 델포이의 아폴로 신전에, 신탁의 사은으로 어느 현자가 헌정한 편액에 새겨진 글귀라고 한다.

아무튼, 악처를 만난 복덕으로 철학자가 됐다는 땟거리 없던 거리의 철학자, 바보(?) 같은 수많은 중생들을 꾀어 배부른 돼지보다 배곯는 그를 따르게 했던 소크라테스. 그가 그 신전으로부터 잡도리한 그 글귀는 평생 그의 철학적 화두가 된다. 그것은 소크라테스의 철학적 주제와 관심이 더 이상 우주의 원리와 같은 것에 있지 않고, ‘인간’의 문제를 문제 삼으면서 인간 중심으로 바뀌게 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그대 자신을 알라’고 한 그의 채근은 사람에게 자신을 지탱하고 있는 궁극적인 근원에 대해, ‘나는 누구인가’ 스스로 묻게 함으로써, 그에 대해 무지함을 깨닫게 하는 엄격한 철학적 반성의 요구였으며, 진리 탐구라는 것도 그러한 질문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당위의 역설이었을 것이다. 결국 소크라테스는 사람들로 하여금 ‘무지의 지’ 즉 자신에 대한 무지의 자각을 실마리로 인간의 존엄과 평등성을 각성케 하고, 그로부터 발현된 자긍과 애타의 마음으로 올곧은 삶을 영위하기를 촉구한 것이라고 하겠다.

대략 150여년 소크라테스를 앞서, 인도에서는 우주를 깨고 나온 천지개벽의 일성이 있었다. 바로 ‘인간 존엄’을 선언한 샤카무니 붓다의 사자후다. 인간의 삶을 주관하는 주체는, 당시 인도의 지배계급인 브라만이 그들의 위상 강화를 위해 만든 수많은 ‘요청된 신(?)’들이 아니며, 또한 개인의 존엄성이 철저히 말살된 노예계급도 브라만이 영속적 지배를 위해 제멋대로 제정해 놓은 것으로, 결코 숙명의 굴레가 아님을 만천하에 주창하신 것이다. 그것은 모든 기망과 허상을 깨부수고 인간의 절대 자유와 평등을, 그야말로 ‘맞아 죽을 각오’로 천명한 대혁명이었다.

나아가 각자 한 생명, 한 생명이 그들의 자유의지에 의해 붓다든, 무엇이든 될 수가 있는 밑꼴이기에, 존귀한 자유인임을 일깨워준 인간에 대한 절대긍정이었다. 인간승리였다.


그러나 불행히도 사람들은 그런 영광된 밑천을 지니고도 ‘나, 나의 것’에 대한, 이기적인 ‘닫힌 갈망’으로 남들과 도리 없이 부딪침으로써, 혹은 성취하지 못한 갈망을 아쉬워하거나 그것에 절망함으로써 고통을 자초하게 된다.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은 “행복은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 ‘에고’를 버림으로써, 마음을 비움으로써 얻는 것”이라고 한 바 있다. 그리고 셰익스피어는 “죽음을 제외하고 ‘나의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했다.

붓다께서는 그 이기적인 ‘나’의 깨어짐과 무화(無化)의 가혹한 과정을 통해, 점차 고통에서 해방되고 동시에 ‘너’의 고통에 깊은 연민과 동정을 느끼게 된다고 하셨다.

그것은 나를 보는 만큼만 세상을 보게 되며 나를 놓은 만큼만 ‘함께’가 함께하는, 그래서 나의 무화가 완성될 때 비로소 ‘세상’이 된다는 심심 미묘한 역설적 진리이다.

풋풋하고 달차근한 바람결에 꽃향내 천지에 그윽하고 연초록 잎사귀들 위로 날빛 눈부신 오월에, 세상 자체로 사신 분, 샤카무니 붓다께서는 친애하는 그대에게 이렇게 진리로 오셨다. 사람이여! “하늘 위 하늘 아래 오로지 홀로 존귀한 자여! 그대. 자신을 보라! 그리하면 세상을 보게 되리니.”


박재욱 / 나란타 불교아카데미 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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