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신, 일상, 깨달음 - 목련꽃 그늘 아래서

2010-04-26 (월)
크게 작게
춘삼월도 다 지나고 면사포를 덮어쓴 듯 부끄러운 미소로 소리 없이 웃고 있는 백목련의 향연에 취할 수 있는 사월은 참 고마운 시간이다.

잎보다 먼저 피는 꽃들이라 그렇게 신비스러운가. 노란 쇼울을 드리운 듯한 산수유도 멋들어진 자태를 뽐내고, 아기피부처럼 연한 핑크빛 매화꽃잎은 황홀하기 그지없다. 희다 못해 푸르름까지 느껴지는 목련꽃 등불을 환하게 밝힌 사월의 거리는 가던 발걸음을 멈추어 서게 한다.

나무에 피는 연꽃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 ‘목련’. 그래서 물에 띄워진 연꽃처럼 슬퍼 보이는가. 왠지 모를 아련함이 백옥 같은 목련을 볼 때마다 느껴진다.


잎도 하나 없이 세상에 나오느라 얼마나 힘들었을까? 며칠 전만 해도 앙상했던 가지였는데 자고 일어나니 목화솜을 밤새 떼어놓은듯 풀도 없이 가지 끝에 매달려 있다. 가만히 다가가 입을 맞춰본다. 마음 속까지 스며드는 향기. 절로 눈이 감긴다. 문득 청아하게 들려오는 아련한 멜로디에 사춘기 소녀처럼 가슴이 부풀어 오른다.

‘목련꽃 그늘 아래서 베르테르의 편질 읽노라/ 구름꽃 피는 언덕에서 피리를 부노라/ 아아 멀리 떠나와 이름 없는 항구에서 배를 타노라/ 돌아온 사월은 생명의 등불을 밝혀든다/ 빛나는 꿈의 계절아 눈물어린 무지개 계절아’
갈래 머리 땋고 빳빳하게 풀 먹여 세운 교복칼러처럼 청초한 소녀의 꿈이 되살아난다.

무거운 책가방 안엔 곱게 접어 넣은 핑크빛 편지도 살짝 끼워 넣고, 지난 가을 불나방처럼 떨어지는 낙엽 한 장에 애송시를 깨알같이 적기도 했지. 까르르 하며 하교길에 삼삼오오 몰려다녔던 행복한 발걸음은 꿈을 나르는 배달부였다. 눈가루처럼 하늘에서 쏟아지는 연분홍 복사꽃 비를 온몸으로 맞으며 끝없이 펼쳐지는 인생의 꿈 이야기를 나눴었지. 밤새 친구도 듣고 하늘의 별도 미소 띠며 귀 기울였었는데….

꿈꾸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 꿈꾸는 사람은 희망을 먹고 산다. 현실이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마음속에 고인 간직한 아련한 꿈을 끄집어내어 믿음의 길을 닦아나간다. 꿈은 마음이 순수한 사람들만 소유할 수 있는 하늘의 선물이다. 순수한 마음을 좀먹어 들어가는 걱정, 근심, 악함과 거짓말은 꿈꾸는 행복을 송두리째 빼앗아 간다. 그래서 매일 밥을 먹는 것처럼 마음을 지켜내야만 한다.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장수보다 낫다고 성경은 말씀하지 않은가! 그만큼 마음을 지키고 평강을 유지하는 일이 쉽지 않다는 뜻이다.

그래서 기도한다.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많은 한계상황을 넉넉히 극복할 수 있는 길이 모든 것을 멈추고 기도할 때 가능하기 때문이다.

목련 꽃잎을 유심히 바라본다. 살짝 포개진 하얀 꽃잎이 기도하는 손 같다. 추위를 견뎌내고 피는 꽃이어서인지 그토록 말이 없다. 아마도 청아한 하늘음성을 듣고 있나 보다. 꿈길 따라 동행하는, 보이지 않는 믿음의 식구들과 함께 천국을 산책하는 것을 꿈꾸며.


정한나 / 남가주광염교회 사모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