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이민자의 딜레마

2009-11-12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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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숙(프린스턴 참빛교회 목사)

지난 5일, 텍사스주의 포트 후드 미군기지에서 요르단 출신으로 이라크로 파병돼 동족과 전쟁을 하는데 대해 상당한 부담감을 호소했던 니달 말릭 하산(39) 미 육군 소령이 총기를 난사해 많은 동료 군인들의 사상자를 낸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이 비극적인 사건은 미국에 이민 와서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이민자의 위치와 바른 정체성 정립에 대해 많은 숙제를 안겨주고 있다. 우리 이민자들은 이민 온 현실적 국가와 자신 혹은 부모나 조모의 나라인 모국, 곧 가슴에 품은 국가-두 나라를 가진 자들이다. 우리 이민자가 어떤 정체성을 갖고 이민 국가에 적응하며 살아가야 하는가가 과제이듯이 미국 정부 또한 이에 상응
하여 어떻게 이민자들로 구성된 나라를 세워가야 하는가가 오랜 세월 현안이 되어 왔다.

대표적인 이민화 과정에 대한 은유적 표현으로 ‘멜팅 팟’과 ‘샐러드 보울’이 있다 전자는 이민자들이 과거의 문화적 유산을 버리고 완전히 새로운 문화에 동화되도록 하는 정책이고 후자는 이민자들이 과거의 다양한 문화적 유산을 보존하면서 함께 공존하여 새 문화를 형성해 나가는 정책을 말한다. 다문화주의와 동화주의의 차이를 조정하는 시도가 이어져 왔는데 이들은 이민자들이 멜팅 팟 이론에 도달하기 위해 자기들의 문화와 전통을 완전히 버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이민자들은 자기들의 문화 전통을 유지하고 실천하며 살다가도 결정적인 경우에는 자기 주인 나라의 이익을 첫 번째로 생각할 것이라는 것이다. 이로써 이민자들은 동화주의자들이 멜팅 팟 이론에서 얻게되는 긍정적인 결과인 진보와 단일화와 성장을 꾀할 수 있고 동시에 다문화주의자들의 요구도 들어주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번 사건에서처럼 둘 사이에서 밸런스를 유지한다는 것은 그리 간단한 일만은 아니다. 범인인 이민자 하산 소령은 전쟁과 같이 예외적으로 모국에 총부리를 겨누어야 하는 갈등이 극대화된 딜레마적 상황에서 자기가 살아온 주인 나라의 이익만을 우선적으로 간단히 선택할 수 없었던 것 같다.
그에게는 종교국가인 모국에 대한 민족의식이 특별한 종교적 성스러움의 이미지와 혼합되어 잠재의식 안에 무시할 수 없는 영향력으로 자리잡았을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자신의 이성과 감정과 의지가 동의할 수 없는 당위적 상황에 직면해서 큰 심리적 소요와 혼란과 분노감에 휩싸였을 것이다.

민족의식이나 민족감정 역시 구성원들에게 ‘성스러운 조국’, ‘민족의 독립’, ‘선택받은 민족’ 등과 같은 도덕적 당위 명제를 부여함으로써 사람들에게 행위 규범을 제공하고 생존의 의미를 부여한다고 했던 뒤르껭의 말은 공연한 말이 아니었다. 어쩌면 이 비극적 사건의 범인인 하산 소령은 장윌(Zangwill)의 연극 ‘멜팅 팟’의 주인공처럼 미국을 연모하여 사랑에 빠졌다가 성장과 함께 그 내막이 드러나 현실로 다가오자 두려움과 자기 갈등을 이기지 못하여 주인공인 데이빗과는 다르게 연인을 사살하고 자기의 생을 비극으
로 마감한 불행한 주인공같은 생각이 든다. 하산 소령에게 진정 필요했던 것은 모국의 존엄도, 현 주인 국가의 명분도 아니요, 다만 그를 간절히 공감해 줄 수 있는 따뜻한 사랑의 나라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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