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책과 계절

2009-11-09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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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빈(교도소 심리학자)

가을이 오면 등화가친이라 하여 책 읽는 계절이 왔다고 말한다. 술을 좋아하는 사람이 사시사철 술을 먹듯이 책을 좋아하는 사람은 굳이 가을에만 책을 읽지 않는다. 경상도 표현에 문둥이라는 말이 있다. 이 문둥이는 원래 문동(文童)이라는 말에서 온 말이라고 한다. 즉 글 읽는 아이라는 말이다. 인간의 역사는 문자의 발명에서 시작했다. 아이가 세상에 나서 학교에 첫 발을 들여놓으면 우선 먼저 글 읽는 법부터 배운다. 그것은 글읽기의 시작은 인간대열에 참여하는 첫 발 디딤이기 때문이다. 한국인의 향학열은 세계적으로 알려져 있다. 이렇게 높은 수준을 가진 한국인 중에 책읽는 모습을 찾아보기 어려운 것은 무슨 일일까. 책읽는 사람도 없고 읽으라고 권장하는 사람도 없고 책 안 읽는 것을 걱정하는 사람도 없다. 어떤 작가는 인생을 나무에 비길 수 있다면 책은 그 나무에 달린 잎사귀와 같다고 하였다. 그렇게 나뭇잎처럼 숱한 책들은 이제 몹쓸 계절을 맞아 읽히지도 않은 채 바람에 날리며 땅에 떨어지고 있다.

프랑스 작가 몰리에르는 글을 쓰는 행위는 마치 창녀가 몸을 파는 행위와 같다고 하였다. 처음에는 글쓰기가 좋아서 쓰고 다음에는 친지를 위하여 쓰고, 나중에는 돈을 받고 쓰기 때문이라고 한다. 글을 써내는 대로 그렇게 돈이 생긴다면 글쓰는 이가 더 늘어날 것이다. 등화가친이라는 말을 처음 써 본 사람은 그 자신이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원고
는 가을에만 책을 읽으라는 말이기 보다 책읽기에 좋은 계절이니 다른 때 보다 더 많이 읽으라는 권고일 것이다.

우수수 낙엽이 떨어지는 가을은 슬픈 계절이면서 깊은 생각을 하게 하는 계절이다. 황홀한 나뭇잎의 빛깔과 그들을 몰아치는 바람 속에는 격정마저 깃들어 있다. 그리하여 가을의 계절을 슬픔과 격정이 섞인 사랑의 분위기를 자아낸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은 마치 사랑을 하는 사람과도 같이 책과 손을 잡으며 팔짱을 끼기도 하고 가슴 위에 가볍게 얹어 놓기도 한다. 조심스럽게 그것을 열며 한시도 거기서 눈을 떼지 않고 은밀한 침실 낮은 등불아래 자신의 숨소리와
책의 숨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런 후 얼굴을 책에 묻으며 그것을 껴안은 채 잠이 들기도 한다. 사랑하는 독자여, 이 가을의 계절이 다 가기 전에 책 한 권을 구입하여 격정 있는 사랑을 한번 해보지 않은려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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