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그때 조선에서는 어떤 일이

2009-10-21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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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춘기(골동품복원가)

날씨 좋은날 부산 송도에서 맨눈으로도 보이는 일본땅 쓰시마! 그렇게 지척에 있는 일본에서는 이름하여 명치유신이라는, 근대화를 위한 서구식 민족개조운동이 마치 용암의 화산과도 같이 불타오르고 있을 때 조선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었는지 더듬어 본다. 1863년 열한살의 나이로 개천에서 놀다가 뜬금없이 왕위에 오른 고종. 왕의 아버지 흥선대원군이 선정이 되어 천하를 호령하는 대권을 거머쥔다. 이때가 일본의 명치유신 4년 전이다. 당시 조선사회는 1690년대 총인구의 4.8%이었던 양반이 1858년에는 무려 48.6%로 전체인구의 반절이 지배계급(양반)이었다(경성재대.경제연구서).

이들 양반계급은 한정된 소수의 벼슬자리를 놓고 사생결단식으로 당파싸움에 몰두했다. 이런 와중에서도 박지원(1733-1805) 정약용91762-1836)등의 선각자에 의해 조선의 통치철학인 유교(주자학)의 수구성을 실학.실용적으로 발전시켜 근대화로 가는 물고를 터 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대원군은 이런 역사의 흐름에 일대 철퇴를 가하고 나섰다. 그에게는 어린아들 고종의 반석같은 왕권확립이 최우선이었다. 서방으로의 개방, 서구식의 개혁이야말로 이씨 왕조를 위태롭게 하는 역적으로 다스려야 한다고 대원군은 작심한다. 임진왜란때 소실된 경복궁을 재건하고 동시에 천주교신자 8천명을 순교시켜 전국 유생(유교학자)의 전폭적인 지지를 이끌어냈다.


대원군은 시대적 통치이면으로 위정척사(衛正斥邪:정의를 지키고 사악한 것을 물리친다)를 전면에 내걸었다. 이것은 중화주의를 ‘정’으로 하고 중화문명에 종속하지 않는 민족을 ‘사’로 보는 조선특유의 소중화사상에서 나왔다고 본다. 대원군 통치 전후해서 얼마나 집요하게 서방진영이 통상을 요구하며 한반도의 문턱을 드나들었는지 알아본다. 1865년 러시아와 독일상선이 2회에 걸쳐 강화도 진입 1866년 미국 샤만호 대동강에 진입. 1867년 프랑스 극동함대 전함 2척 강화도 침입, 프랑스 전함 7척 강화도 상륙,1868년,독일 선박 침
입, 1871년 미국 아시아함대사령관 로재스 군함 5척 이끌고 개항요구, 1872년 일본 군함 2척 침입 개항요구... 멀리 갈 것도 없이 1960년대! 아시아의 판도가 뒤바뀌려할 때, 바로 중화권이 무너져 내릴 때 조선의 유교는 대중화주의를 대신하여 소중화주의에서 명분을 찾고 그 명분에 달려 망해갔다.

역사를 사실외적 가능성을 놓고 논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러나 사실이 하도 억울해서 한번 생각해본다. 만일 대원군이 유교적 중화질서에서 과감히 탈피하고 1866년 미국상선 샤만호가 대동강을 거슬러 평양까지 진입했을 때 적극적으로 교섭에 나서 미국과의 통상조약까지 이끌어가 어느 외국보다 먼저 돈독한 국교관계를 수립했다고 하였을 때 조선의 근대화는 일본을 능가했을 것이다. 그것은 오늘의 한국이 이를 증명하고 있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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