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감개무량한 코리안 퍼레이드

2009-10-20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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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황석 (서재필기념 친우회 사무총장/약사)

“우리 앞에는 북과 나팔을 불어대는 미국아가씨들의 고적대가 팡파르를 연주하고 있네요. 한 불럭 거리에서는 꽹과리와 징을 두들겨대며 춤을 추는 한국농악대의 농악놀이가 맨하탄을 진동하고 있어요.” “미국아가씨들의 고적대에서는 백인들에게 땅을 빼앗긴 인디언의 북소리같아 슬픕니다. 5천년동안 우리민족의 한과 멍든 가슴을 두들겨주는 민족의 애환이 서려있는 한국의 농악대 소리는 우리나라가 경제대국이 되고 보니 이제 맨하탄의 지축을 울리는 거대한 승리의 함성으로 들립니다”

퍼레이드를 하면서 옆 목사님과 나눈 대화다. 이민생활 36년 넘게 하면서 코리언 퍼레이드행진에 합류하기는 이번이 두번째였다. 전에는 연도에서 구경꾼노릇이 고작이었었다. 내가 이번에 코리언 퍼레이드에 주체세력(?)으로 참여하게 된 건 서재필박사 때문이다. 지난 4월 필라에서 열린 서재필박사 기념행사에 참석했다. 뉴욕에서 4명이 가 다운타운 리틀디어터에서 시청까지 걷는 퍼레이드를 벌였다. 명칭은 ‘필라델피아 코리안 콩그레스대회 90주년 기념 대행진’이다. 역사가 눈물겹다. 1919년 조국에서 일어난 3.1독립만세 소리는 태평양을 건너 미국에 메아리쳤다. 필라델피아에서 개업의를 하고 있는 서재필박사는 돈과 명예가 보장된 의사 가운을 벗어던지고 조국해방 전선에 뛰어든다. 그는 미전역에 흩어져 있는 한국인들에게 연락하여 필라델피아에서 미국판 3.1만세운동을 펼친다.


그게 1919년 4월14일-16일. 150명이 모였다. 그 중에는 친한파 미국인 50명이 합세해줬다. 지금이야 200만 한인이 미국에 살지만 그때 1000여명 전후였다. Korean Congress(한국인대회)라고 했다. 리틀디어터 극장에서 한국독립선언식을 하고 시청으로 행진했다. 앞에는 필라시청 밴드가 팡파르를 연주하고 뒤에는 미국 기마대가 에스코트를 해줬다. 한민족 최초의 퍼레이드였다. 눈물과 감동의 행진이었다. 나폴레옹의 개선문 행진보다도 청와대로 향하는 혁명주체의 행진보다도 더욱 당당한 퍼레이드였다. 리틀디어터를 떠난 퍼레이드는
시청앞까지 가서 해산했다. 그러나 그때 시작한 코리언 퍼레이드는 잠시도 멈추지 않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뉴욕 한인들이 해마다 추석이면 맨하탄 한인타운에서 벌리는 코리안 퍼레이드의 원조는 필라에서 시작한 서재필의 코리언 콩그레스인 것이다. 지난 4월 필라행진을 하면서 이 사실을 알게 된 나는 추석맞이 코리언 퍼레이드에 적극적으로 참가하기로 했었다. “서재필박사기념 친우회”라는 프래카드를 앞세우고 코리안 퍼레이드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페레이드를 통해 한인사회가 보인 힘찬 대행진은 미국사회가 놀랄 만큼 엄청난 위력이었고 잠재력이였다. 우리 핏속에 도도히 흐르는 그 훌륭한 유전자를 가지고 있다는 자부심과 긍지를 새롭게 깨우쳐 준 그 코리안 퍼레이드를 한민족의 최대 축제로 이끌어준 한국일보에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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