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기자의 눈/ 실직자가 된 어느 도매상 사장

2009-10-07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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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노열(취재 1부 부장대우)

“요즘 재고품들을 세일즈하고 다니는데 이것도 쉽지 않네요. 이 짓 할 날도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습니다.” 맨하탄 한인타운에서 우연치 않게 만난 박 모 사장. 박 사장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잡화 도매상을 운영하던 이른바 ‘사장 출신 실업자’다. 그는 지난 8월경 불황파고를 견디지 못하고 5년 이상 경영하던 회사를 정리한 후 소매상들을 찾아다니며 재고품들을 처분, 판매하고 있다.

박 사장의 회사는 대규모는 아니었지만 뷰티서플라이, 커스텀주얼리, 손수건 등을 중국에서 수입해와 미동부지역 소매상에 물건을 대던 전형적인 잡화 도매상이었다. 잘나갈 때는 직원이 10명이 넘었다. 그의 회사가 흔들리기 시작한 것은 불경기가 본격화 됐던 2년 전부터. 다른 품목과는 달리 커스텀주얼리는 경기를 타지 않을 것으로 철석같이 믿었지만 결국 원가 보전도 하지 못해 빚만
쌓이고 말았다. 게다가 뷰티서플라이 제품들은 판매망이 막히다시피 하면서 창고만 차지하는 ‘애물단지’로 전락하는 신세가 돼 버렸다.


“내가 일일이 소매상을 돌며 이렇게 세일즈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재고품을 그냥 헐값에 넘기기가 아까워 이 일을 시작했는데 이것도 그만 둘 생각입니다.” 떨이로 처분하기에는 그동안의 노력이 억울(?)하다는 생각에 내린 궁여지책이었지만 불황의 벽은 이마저도 허락하지 않는 거 같다는 게 박 사장의 설명이었다.

박 사장의 경우가 극단적인 사례일까. 아니다. 끝이 보이지 않는 극심한 불경기가 이어지면서 박 사장과 같은 ‘사장 출신 실업자’는 우리 주위에 매일 생겨나고 있으며 당분간 더 늘어날 것이 자명하다. 관련업체에 따르면 지난해부터 문을 닫거나 개점휴업에 빠진 한인 수입 도매상들이 줄을 잇고 있다. 일부 품목의 경우 경비를 줄이기 위해 아예 업소를 처분하고 자동차로만 영업에 나선 도매상들도 생겨나고 있다.

“문제는 앞으로 어떻게 먹고 살아가는 하는 겁니다. 이곳에서는 더 이상 희망을 찾을 수가 없어 타주로 이주해 새롭게 이민생활 시작할 생각인데 그것도 잘 될지 모르겠습니다.” ‘희망을 찾을 수 없다’는 말과 함께 길을 재촉하는 박 사장에게 기자도 작별인사로 뾰족이 뭐라 할 말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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