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칼럼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2009-10-05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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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효섭(아동문학가/목사)

뉴욕타임스 월요일 판에 33년 동안 매주 칼럼을 쓴 언어의 귀재(鬼才) 윌리엄 사파아어(William Safire)씨가 지난 달 27일 79세를 일기로 췌장암으로 쓰러졌다. 그가 남긴 칼럼은 3천 편, 예리한 정치적 견해와 깔끔한 문장에 전 세계가 취하여 그의 글이 발표되는 곳마다 찬사와 갈채가 그치지 않았다. 그는 많은 신조어(新造語)들을 만들어 현대 영어에 큰 발자국을 남겼으며 퓨리처 상을 받기도 하고 뒤에는 퓨리처 상의 심사위원이 되었다.

워터게이트가 터지기 직전까지 닉슨 전 대통령의 연설문 집필자로도 있었고 보수 언론의 대표 주자로 레이건 혁명에 불을 붙인 자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뉴욕타임스 매거진에 연재한 칼럼 On Language는 이 난 때문에 잡지가 팔린다는 정도의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필자도 뉴욕에 들어온 후 윌리엄 사파이어의 30년 애독자로 2005년 1월 24일자 그의 최후의 칼럼을 읽으면서 깊은 감회에 젖었던 기억이 새롭다. 그의 마지막 칼럼은 “칼럼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였다. 그 중 몇 가지만 귀담아 들어야 할 것들을 소개한다. 칼럼을 읽을 때 누구의 말을 인용했으니까 집필자의 사상도 그와 같을 것이라고 넘겨 잡으면 안 된다. 우파 칼럼이 곧잘 케네디의 말을 인용하고 좌파 칼럼이 흔히 레이건을 인용하고 있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또한 칼럼 독자가 빠지기 쉬운 함정은 ‘내 편 집필자’라는 선입관을 가지고서 자기의 생각과 어느 정도 맞는 칼럼니스트가 쓴 글이면 무조건 바른 방향이라고 믿고 따라가는 위험이
다.


칼럼이란 끝까지 다 읽어도 영문 600자, 한글 2천자, 읽는 시간 10분 이내의 짧은 글인데 읽다가 마음에 안 든다고 중단하면 칼럼의 진가를 놓치게 된다. 칼럼의 종합된 결론은 마지막까지 읽어야 이해되며 칼럼이라는 특수한 글의 맛은 끝까지 읽어봐야 음미할 수 있다. 칼럼은 보통 일간신문 주간지 등 시사를 다루는 지면에 실린다. 따라서 칼럼에 시사성이 들어가는 것은 당연하며 최근의 정보가 인용되는 경우가 많다. 정보란 시간을 따라 변하는 것이므로 칼럼에 인용된 정보에 오류가 있을 수도 있다. 특히 전문적인 보도진이 아니고 외부 집필자의 경우 더욱 그렇다. 정보 상의 작은 실수는 묵인하고 넘어갈 줄 아는 것도 칼럼 읽기의 요령이다.

윌리엄 사파이어 씨는 자기가 싫어하는 칼럼을 말하였다. 그것은 집필자가 자기의 지식을 내세우려는(혹은 자랑하려는) 칼럼이다. 이것을 칼럼의 사족(蛇足)이라고 말한다. 뱀을 잘 그려놓고 거기에 다리를 붙이면 모처럼의 명화나 만화가 된다. 이것은 칼럼 집필뿐이 아니다. 모든 글, 연설, 설교 종사자들도 이 함정에 빠질 우려가 대단히 많다. 그러기에 사람은 속은 알차고 겉은 늘 평범한 것이 바람직하다. 드러내지 않음이 들어나는 결과를 낳는 것이므로 일부러 드러내려고 할 것은 없다. 꾸준히 알차게 살면 누가 선전해 주거나 광고를 안 해도 인정될 때가 있다. 유명한 사람은 많아도 훌륭한 사람은 적다는 말을 하는 것도 이런 데에 이유가 있다.

지금은 많이 광고된 상품이 좋은 상품이라는 착각이 지배하는 사회이므로 광고가 비즈니스의 키를 쥐고 있는 것 같지만 사람의 경우는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연방정부 커뮤니케이션 국은 TV광고의 음량(音量)을 전반적으로 낮추는 법안을 준비하고 있다. “TV의 음량이 너무 커서 시청자들이 염증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우리도 잘 안다.”고 전국 광고협회 댄 제프 부사장은 말하면서 “음량 주리기는 방송국 측이 자체적으로 해결할 것이니 법까지는 만들지 말라”고 주장하지만 결국 이 법안은 상정될 것이다.

한국 방송을 들으면 광고뿐이 아니라 연속극만 들어도 너무 소리들을 질러 젊은이를 빼놓고는 대개가 염증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외국인이 한국 식당을 기피하는 이유 중의 하나가 너무 시끄럽기 때문이라고 한다. 선진 대열에 서려면 우선 거리와 공공장소 방송 등에서 ‘볼륨 낮추기’를 사회운동으로 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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