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가깝고도 먼 섬, 강화도

2009-10-02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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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태 (시인)

지금은 강화대교라는 이름으로 다리가 놓여 강화도로 가는 길에는 더 이상 나룻배가 필요 없는 아주 가까운 섬인데 강화도는 아직도 우리들 마음속에서는 먼 곳에 있다. 서울에서 가장 가까운 섬인데도 마음에서는 멀고 먼 섬으로 아직도 남아있는 섬 강화도. 제주도를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섬으로 말하지만 제주도(濟州道)를 제주도(濟州島)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사실 나는 강화도를 우리나라의 제일의 섬이라고 말하고 싶다. 강화도 마니산은 원래의 이름이 마리산으로 옛 지도에 되어 있다. 머리를 뜻하는 이름으로서 사람 몸에 똑같은 길이로 두 팔이 늘어져 있듯이 백두산 천지와 한라산 백록담의 거리가 똑같다.
석기시대 이전부터 강화도는 살기 좋은 곳으로 알려져 목적지 없이 남쪽으로 길을 걷던 사람들이 강화도에 정착하여 살았던 살기 좋은 곳.

이씨조선은 이성계에 의하여 세워지던 날부터 이씨조선이 문을 닫는 고종 때까지 나라는 정통성 없는 분당과 패당 싸움의 연속이었고, 이성계집안조차 부모자식 사이가 툭하면 서로 위해하는 처지가 되었고, 형제끼리도 서로 죽이고 귀양을 보내는 보기드믄 패가적 집안이었다. 세조가 된 수양대군은 자기의 친 형제인 안평대군과 그의 아들 우직을 왕위를 지키는데 걸림돌이 되고 위태롭다고 강화도로 유배를 보냈고, 광해군도 제주도로 유배를 보내기 전 강화도로 먼저 유배를 보냈다. 패륜왕으로 낙인이 찍힌 연산군이나 인조의 아우 능창군, 철종의 아버지 은언군이나 영창대군도 예외가 아니었다. 또한 중종과 순조의 시대를 거치면서 당파에 가담하여 출세가도를 달리면서 결국 좌의정 자리까지 승승장구하던 송강 정철도 정치판을 떠나 자의로 강화도 송정촌에 귀양살이 하듯 우거하다 58세의 나이로 ‘세상은 허무하다“ 한마디 놓고 세상을 떠났다.


강화도는 우리에게 무엇이었으며, 우리의 역사에서는 또 무엇이었을까? 한양(서울)을 지켜낸 성문이었을까? 역사를 지켜낸 방어의 보루였을까?
고려 때에는 몽고군을 피해 수차례나 수도를 강화도로 옮겼고, 구한말 때 대원군에 의한 천주교도 박해로 학살된 불란서 신부의 보복조치로 강화도로 침입한 불란서 함대를 양헌수가 이끄는 관군이 강화도 정족산정에서 물리쳐 승리한 병인양요라든가, 미국상선 셔먼호가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가다 평양 시민에 의해 침몰되자 이에 대한 보복조치로 미국 함대가 강화도로 몰려 왔으나 이재연이 이끄는 관군에 의해 패하고 돌아간 신미년의 신미양요 사건, 대소 환란을 겪으면서도 환란이 지나면 또 잊혀지는 서울에서 가장 가까운 강화도였다.

근세사에 기록된 서구 함대의 침입이라든가, 잔악무도한 일본군의 무력잠입으로 체결되어 조선침략의 입지를 제공한 강화조약이라든가, 강화도령이라 불리던 철종이 짚신 신고 편안하게 농사짓던 강화도, 지리적으로는 참으로 가까운 곳인데 아직도 우리의 마음속에는 뭔지 모르게 멀리 떠 있는 강화도다. 아니, 강화도를 더 멀리 떠다밀고 싶은 우리들 마음에다 송강 정철은 사미인곡을 지어 구국(求國)새로 울었을 런지도 모르고, 관동별곡을 지어 귀양이 귀향이 되는 그리움을 토해 냈는지도 모른다.

지금은 돈이 있다 하는 몰지각한 사람들의 마지막 투기 대상이 되면서 부터 땅값이 천정부지로 오르고, 땅값 오르는 소리와 몰래몰래 찾아드는 투기꾼들 그늘에 눌려 허물어지기 시작하는 마지막 남은 옛날의 모든 것, 역사가 두꺼운 주름살을 만들어 놓은 강화도의 얼굴을 현대와 개발이라는 칼로 얼굴 전체를 알아보지 못하게 성형수술로 바꾸고 있다. 가물가물 마음에서 멀리 떠 흔들리는 강화도의 그 그리움의 소중함이 모두 허물어지고 있다. 백두산이 민족의 산이라면 강화도는 민족의 섬이다. 강화도에도 시민연대가 있으니 이런 끔찍한 일들을 뜯어 말릴 수는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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