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미국선거와 우리

2009-10-01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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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기선(전 하버그룹 수석 부사장)

지난 9월 14일에 있었던 민주당 예선에 참가한 한인과 중국인 통역관들에게 배부된 뉴욕시 선관위의 설문 중에 다음과 같은 질문이 있었다. 통역관들에 대한 다른 미국선거 종사자들의 태도가 어떠했는지 하는 설문이었다. 한국어 통역관으로 참가해서 이른 새벽 다섯 시부터 밤 아흡시가 넘도록 그 긴 시간을 보내면서도, 한편으로는 자긍심과 보람을 느꼈던 것이 사실이다. 내가 일했던 투표소에는 38명의 종사자들과 배석 경찰관까지 모두 39명이 하루를 같이 보냈다. 통역관들 세 사람과 그 외의 중국인 두 사람 외에는 나머지 모두가 백인들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통역관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완전히 무표정했다고 말하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별로 관심이 없어서인지, 아니면 표정관리를 무척 잘하는 전형적인 미국인들의 태도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하여간 별로 색다른 것은 느끼지 못했다.

뒤에서 자기네들끼리 무슨 말들을 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무척 자연스러웠고 지나칠 때면 가슴에 붙어있는 명찰에 써있는 이름정도는 힐끗힐끗 보는 것도 같았다. 투표는 계속되고, 저녁 무렵 점잖게 정장한 한 백인 중년 신사가 투표를 마치고 나오면서 세 통역관(한국어, 중국어, 그리고 스패니쉬)들이 나란히 앉아있는 테이블 앞으로 걸어와서 하는 말이, 선거는 분명히 미국시민이어야 하는 것임에는 틀림없는데 왜 외국어 통역이 필요한지 자기는 이해가 안 된다는 것이다.


이 신사의 말인즉, 시민이 되려면 영어 시험도 치렀을 터인데 영어를 모르면 어떻게 시험에 통과되었으며, 시민이 된 이후에도 왜 지금까지 영어를 못해 통역이 필요하냐는 것이다. 미국 법 자체가 잘못되어 있다고 열을 올리고는 수고들 많이 한다는 인사를 미소와 곁들이면서 총총히 투표장을 빠져 나갔다.
우리 세 통역관들은 서로 얼굴만 쳐다보면서 할 말을 잃었다. 귀화한 시민들을 이렇게 바라보는 미국인들의 눈총은 오직 이 신사만일까? 그리고 나서 얼마 후 80이 훨씬 넘은 연로한 한인 한분이 간신이 지팡이에 몸을 의지하고 투표장 안으로 들어오신다. 이발도 깨끗이 하시고 옷도 아주 단정하게 입은 어른이셨다. 영어를 전혀 못하신다. 처음부터 설명을 해드리고 투표소 안에까지 같이 들어가서 그분이 원하시는 후보자들을 택해 기계작동까지 한 다음 투표를 마쳐드렸다. 그리고는 아들에게 전화해서 와서 데리고 가 달라고 부탁하신다.

얼마 후 차가 왔기에 차까지 모시고가 태워드렸다. 이분은 영어는 모르지만 미국시민의 권리와 의무를 다 하신 떳떳하고 멋있는 미국시민임에 틀림없었다. 차를 기다리면서 당신 이름이 뭐요? 라고 물으시던 그분의 얼굴이 지금도 눈앞에 선하다.얼마 전 미국국회 상하양원에서 연설하던 흑인 대통령에게 거짓말 한다고 백인 국회의원이 소리쳐 모두를 긴장시킨 일,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격으로 한 전직대통령은 이 사건은 인종문제라고 단정짓는 일들, 우리가 살고 있는 미국도 아직 갈 길이 먼 것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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