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기자의 눈/ 미국도 ‘정’이 통하는 나라다

2009-09-25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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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재호(취재 1부 기자)

끝이 보이지 않는 영주권 적체와 좁아지는 문호로 고통 받고 있는 한인들에게 사람 냄새나는 이야기를 해 보고자 한다. 지극히 사적인 이야기로 실명과 정확한 내용을 전달할 수는 없지만 이민자로서 힘들게 미국에 살아가고 있는 한인들에게 작은 웃음을 줄 수 있는 이야기라 생각한다.한국에서 이민 브로커에 속아 수백만 원에 달하는 수수료를 지불하고 캐나다를 통해 밀입국한 한인 박은정(가명·32)씨.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한 덕분에 미국에서 대학도 졸업하고 시민권자 남편을 만나 가정도 꾸미게 됐다.

그러나 밀입국을 했다는 이유로 인해 박씨는 영주권을 신청할 수 없었고 미국에서 대학을 졸업했으나 취업도 할 수 없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첫 딸 아이를 낳은 지 얼마 안 되어 이민국 직원에게 단속을 당해 추방재판에 회부가 되는 상황을 만나게 됐다.1년간의 재판 끝에 그는 결국 추방 결정이 내려졌고 최종 판결에 앞서 이민 판사와 대면하게 됐다. 당시 한 살도 채 되지 않은 딸아이는 엄마와의 이별을 예견한 듯 판사 앞에서 큰 소리로 울기 시작했고 판사는 담당 검사에게 아이의 신원을 물어보았다. 오늘 추방 결정이 내려질 여성의 아이라는 답변에 판사는 잠시 시간을 달라고 요청한 뒤 박씨 가족들을 내보냈고 얼마 뒤 추방 중지 결정을 내렸다. 결국 이 여성은 아이의 눈물로 시민권자의 배우자로서 영주권을 받아 현재 뉴욕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다.


뉴욕에 거주하는 최소연(가명·43)씨는 가정폭력을 행사하는 남편으로 인해 큰 고통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시민권자의 배우자로 영주권을 신청한 상태인 최씨는 이혼도 하지 못하고 남편의 폭력을 묵묵히 이겨내야만 했다. 결국 남편의 폭력을 이기내지 못한 그는 별거를 선언했고 영주권 신청을 취소하지 않는 조건으로 많은 돈을 남편에게 전달했다. 그러나 영주권 인터뷰 당일 남편은 이민국에 나타나지 않았고 최씨는 결국 영주권 불허를 감수한 채 혼자 인터뷰를 보기 위해 들어갔다.

순간 자신이 참고 산 세월에 억울함을 느낀 최씨는 이민국 심사관 앞에서 울기 시작했고 심사관은 그 이유에 대해 물었다. 하늘의 도움일까? 이민국 심사관은 최근 남편의 외도로 이혼을 한 상태였고 최씨의 상황을 전해들은 뒤 같은 여성으로서 남편의 행동에 크게 분개하며 최씨에게 재량으로 영주권을 부여했다.
눈물 나게 힘든 미국 생활이지만 이 땅도 ‘정’이 통하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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