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일본은 아시아인가!

2009-09-25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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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춘기(골동품 복원가)

약 십여년 전으로 기억된다. 가을 맨하탄 센트럴팍 사우스(590스트리트) 차도에 일단의 퍼레이드행렬이 지나가고 있다. 손수레에 끌린 대형북 다섯대. 뒤따르는 300명 정도의 여성들은 동양인, 백인, 흑인, 혼성으로 모두 원색 꽃무늬 찬란한 일본 기모노 차림이다. 아주 질서 정연하게 밥주벅을 손에 든 기모노 여인들은 큰북 장단에 맞춰 일본 고유의 무라마쓰리(마을 축제) 노래와 춤을 추며 서서히 행진한다. 참으로 아름답다. 이 날은 재팬데이(일본날) 센트럴팍 주위를 완전히 압도하고 만다.

일본은 아시아인가! 일본은 진정 아시아적 정서를 가진 아시아인인가 그리고 국가인가의 의구심이 들 때가 있다. 이것은 일본인 스스로를 느끼는 감정이라 본다. 일본열도의 지정학적 위치나 인간들의 생김새로 봐 천상 아시아인인데도 그들의 골수에는 아시아인과의 차별의식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다. 일종의 치근한 우월감이다. 언제부터 이런 황당무계한 망상이 싹 텄을까. 그 배경을 알아본다. 1863년 사쓰마전쟁(영국X사쓰마 규슈)에서 영국함대 앞에 사쓰마는 참패한다. 사무라이들은 패전을 통분하면서도 저함대의 주인공 영국에서 배워야 한다고 당시 강한 쇄국정책으로 일관해온 막부를 무시하고 백여명의 유학생을 영국에 보낸다. 이것이 명치유신(1872-1908)의 도화선이다.


이때 조선은 상투 아니면 주검을 달라고 수구적 오기로 서구에 맞섰다. 막부를 타도하고 천황에게 정권을 바친 유신의 사무라이들은 칼을 버리고 서양을 배워야 산다고 영국으로 독일로 파리로 워싱턴으로 달려가 배웠다. 명치유신 30년사를 논하자는 것이 아니다. 유신동안 십만권에 가까운 서양서적이 일본어로 번역되었다는 사실만으로 유신 30년을 대변하는데 충분하리라 본다.
이 글의 주재는 명치유신동안 일본인의 정신이 어떻게 세뇌 당했는가에 있다. 유신초기 유신사상의 창시자 후꾸자와 유기치(게이오대학 설립자)는 탈아입구(아시아에서 벗어나 서양에 진입한다)를 주장했다.

이 사상은 아시아 속의 일본이 아니라 아시아 대 일본으로 발전하고 급기야 아시아를 선도하고 지배하는 우월민족으로 일본인 머리에 각인시켜 나갔다. 명치유신의 주역의 한사람인 ‘이토히로부미’는 천황의 기독교 개종과 일본어의 영어화를 주장하기도 했다. 한 마디로 명치유신은 역사발전으로의 개화가 아니라 집요하고 철저하게 서양을 모방하였다.

명치 지도자들의 목표는 일본을 아시아의 영국으로 성장시키려 했다. 그래서 이들은 일본인을 명예백인이라 했다. 아무리 자신들을 명예백인이라 해도 서구인으로부터의 반응은 모방의 천재 잽(원숭이)이었다. 여기에서 싹튼 것이 서양에 대한 열등의식을 아시아에서 보상받겠다는 일종의 보복적 보상심리이다.
태평양전쟁(1940-45)이 임박하면서 대일본제국은 동아시아를 한데 묶어 ‘대동아공연권’이라 호칭하면서 이 지역의 맹주로서 ‘서구식민제국주의’로 부터 아시아를 보호하기 위하여 ‘대동아 전쟁(태평양전쟁)을 유발시켰다. 명치유신의 후유증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박정희 대통령은 주위로부터 오해의 소지가 있다면서 강력히 반대하는데도 불구하고 신 헌법의 이름을 ‘유신헌법’으로 고집했다. 그는 일본육군 장교출신이다. 일본인에게 아시아인으로써의 동질성을 구하기란 아직 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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