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덕적도(德積島)

2009-09-16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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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태(시인)

먼 내일에는 또 어느 통지차의 말을 들어야 하고, 소속은 또 어디에 속할지 모르는 덕적도.덕적도는 원래 백제의 소속이었다. 싸움이 많았던 삼국시대에 백제의 국력이 약해지자 고구려와 신라의 쟁탈전으로 인하여 어제는 고구려 소속이 되어 고구려 사람이 되었다가 오늘은 신라의 소속이 되어 신라에 세금을 바치는 신라사람이 되기를 몇 차례, 결국 삼국이 다 망하고 나서야 고려 현종 때 수원 군에 소속을 시켰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인주에 속하도록 하였다.
그후 고려가 망하고 이씨조선이 들러서면서부터는 남양 부로, 그러다가 성종 17 년에 가서는 지금의 인천 도호부로 귀속시켰다. 그러나 그것도 모자라 1885년에는 부천 군에, 1973년에는 옹진 군에, 1995년에는 인천시 광역 시로 통합을 시켰으니 팔자치고는 무척 기구한 팔자를 지닌 섬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팔자가 기구한 곳은 아니었다. 손에 잡힐 듯 많은 물고기와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농토까지 준비하고 사람들이 오기를 기다렸던 덕적도였다. 수심이 깊고 물이 맑아 유난히 바닷물고기가 많은 탓에 신석기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다는 덕적도, 덕적도 해변가를 거닐다보면 수심이 깊고 물 맑은 바다위로 올랐다 들어갔다 하는 많은 물고기를 볼 수 있어 먼 옛날 먹이를 찾아 떠돌던 석기시대 사람들이 이 곳에 들렸다가 주저앉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덕적도는 서해 해상교통의 요충지다.지금은 모두 삭아 없어져 자취를 찾아 볼 수 없지만 당나라 소정방이 백제를 치기 전에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는 제천당이 국수봉에 있었으니 전략적 요충지이자 해상교통의 요지다. 시달림을 많이 받았던 육이오 한국 전쟁, 피난민들이 피난처로 선호했다. 사람들이 많으면 성시를 이룬다고 했던가? 황해도와 인천에서 온 피난민으로 성시를 이루었던 덕적도에는 학생이 800명이 넘었던 북리의 명신 초등학교가 있지만 그 많던 학생들은 주소 한 장 남겨놓지 않은 채 어디로 다 가고 지금은 폐교가 된 건물만이 바닷바람에 흔들이고 있다. 북한군에게 쫓기다 잡혀죽고, 살아남은 많은 젊은이들이 빨갱이라는 누명을 뒤집어 쓴 채 남한 군에 학살을 당하고... 섬에는 없어야 할 충혼탑이 덕적도에 서 있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이제는 쾌속선으로 웃고 떠들며 가는 한시간 거리, 서울과 인천, 그리고 수원 같은 대도시를 인접지역에 둔 까닭으로 일년 내내 끊이지 않는 소풍객들로 성시를 이룬다. 어둡고 침울했던 옛 기억이 덕적도를 찾는 지금의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 그저 하루 이틀정도를 놀다 가면 그뿐이다. 바닷가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홍송을 섞어 우람하게 숲을 이룬 소나무 숲, 솔 향이 옛 기억을 버리지 않고 얼굴을 붉히며 섬을 두루두루 감싼다. 소나무 밭에 앉아 점심을 먹는 사람들, 소나무 숲을 등에 엎고 바위에 서서 낙시를 하는 사람, 능동해변의 자갈마당에서 맨발 밑에 자갈치는 고음소리를 내며 걷는 사람들, 그 위로 떨어지며 사람이며 바다며 산이며 솔숲을 넓은 품에 안는 정 일품의 낙조는 벼슬을 할만도 했다.

사람들은 덕적도의 옛 이름이 “큰 물 섬“이였다고 선뜻 말하지만 나는 그 뜻을 달리했다. 평소에 덕을 쌓아 필요할 때에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준다는 속 깊은 뜻으로 덕적도란 이름을 같게 된 연유가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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