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상생(相生)의 조화

2009-09-01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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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휘(언론인)

말복 처서가 지나고 나니 기승을 부리던 무더위의 기세가 한풀 꺾였다. 해질 무렵 한국에서 한강 고수부지에 나가 보았다. 어느새 가을의 전령 코스모스가 군락을 이루어 활짝 피어 있다. 물가엔 갈대가 소슬 바람에 흔들리고 이름 모를 야생화가 여기저기서 예쁜 모습을 뽐내고 있다. 산책길 사이사이로 들풀들은 한 아름씩 어우러져 서로를 다치지 않고 조화롭게 남은 한철을 누리고 있다. 참으로 아름다운 상생의 묘미다. 사람들은 그토록 더불어 살기를 외치면서도 색깔이 다른 사람끼리는 좀처럼 어울리질 못한다. 천이면 천, 사람들은 그 얼굴 모양이 다른 것처럼 마음까지도 어찌 그리 다른가. 그들의 생각은
왜 그다지도 각이 지고 둥글게 다듬어지기가 어려운 것인가. 뇌의 구조와 기능, 유전자의 역할과 생활 경험은 인간의 사고를 복잡 다양하게 만들어 놓았다.

그것은 한편 호모 사피엔스를 조상으로 둔 인간의 자랑이고, 창조와 발전의 동력이며 만물의 영장을 만든 근원이기도 하다. 독자성이나 주관적 사고는 아무도 범할 수 없는 개별 존재의 특권임으로. 그래서 많은 이견이 분출되기도 하고 대립의 장이 벌어질 수 있다. 자유와 민주주의가 최고의 가치로 인정받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 아니겠는가. 지난날 절대 왕권과 독재 체제를 넘어뜨리
고 근대 국가를 일으켜 세운 시민정신은 바로 여기에 바탕을 두고 탄생한 것이다. 그러니 사람마다 갖는 독자성과 개성, 창의성과 독립의지에 대해서는 시시비비가 있을 수 없다.

문제는 인간 본연의 자유나 독립이 아니라 툭하면 불거지는 집단 이기주의와 편 가르기다. 요즈음 우리 주변을 돌아보면 이런 현상이 너무 지나치다는 느낌을 떨칠 수가 없다. 객관적 가치기준이나, 혹은 양심과 이성의 판단에 따르는 게 아니라 내 편에 이익이 되느냐 아니냐부터 따진다. 이것이 바로 작금의 정치·사회·경제·교육 문제들을 어렵게 만드는 소이연(所以然)이다. 그러니 소리만 요란하고 해결은 어려울 수밖에. 이런 분위기 속에서 절충과 조화의 미덕을 발휘하기란 산에 가서 고기를 낚는 거와 같다. 양보 없는 협상이란 있을 수 없는 법.


한데도 내 것은 한 치도 내 놓으려 하지 않으면서 상대방이 가진 것만 내 놓으라 한다면 그건 이미 협상이 아니다. 상대방을 설득시키려면 서로 의사소통이 이뤄져야 하고, 소통을 하려면 먼저 그쪽의 말을 들어 줘야 하는데 상대 말은 듣지 않고 자기주장만 되풀이 하려고 하니 양철북 소리만 요란할 뿐이
다. 토론과 대화는 건성으로 하면서 머리띠 동여매고 거리로 뛰쳐나와야 의사 전달이 된다고 믿는 사람들. 조용히 말로 하면 거들떠보지도 않는 당국과 언론매체들. 한국의 여당과 야당, 기업주와 근로자, 스승과 제자, 동쪽 사람과 서쪽 사람, 젊은이와 노인, 심지어 부모와 자식, 남편과 아
내까지도 서로 통하지 않는다고 아우성이다.

모두가 잘못 얽히고 설켜 뚫리지 않는 미궁 속을 헤매고 있다. 이제 좁쌀 같은 내 잇속보다 덩치 큰 나랏일 좀 생각하자. 세계 10위권의 경제 대국에 걸 맞는 성숙된 국민의식이 필요한 때이다. 너 죽고 나도 죽는 물귀신 작전은 생존 전략이 아니다. 당신과 내가 함께 일하고 같이 살아나가는 상생의 법을 익혀 나가야 한다. 진보와 보수는 빨갱이와 수구꼴통이 아니라, 사회의 현실적 안정과 미래지향성을 동시에 수용하며 같이 걸어가는 동반자다. 이것이 세계화 시대에 살아남는 길이다. 내 것도 얼마쯤 내 놓으면서, 상대의 양보를 이끌어내는 상생의 조화를 살릴 때 비로소 미래가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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