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미국정치 소용돌이 속 케네디 일가

2009-08-28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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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평 (정치학박사/코네티컷 주립대 명예교수)

미국정치를 공부하고 이해하기 위해서는 케네디 일가의 업적을 고찰해 보는 것도 뜻 깊은 일이다. 미국의 역사학자들은 케네디 일가의 공적을 매우 높이 평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1960년대 부터 반세기동안 케네디 일가의 정치행적을 공부한 바 있는 나 역시 그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 나는 1950년대에 뉴욕 컬럼비아 대학교 대학원에서 정치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 당시 케네디 일가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였으며 학술서적을 출판한 교수의 대통령학(Presidential Power) 강의를 등록해 공부한 후 국가 지도자의 리더십에 대한 공부를 한 바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1960년 대통령 선거에서 40대의 기수였던 케네디와 닉슨의 텔레비전 공개 토론을 처음 보았기 때문에 더욱 관심이 컸다.

1950년대에는 텔레비전이 집집마다 없었기 때문에 스탠드 바(맥주집)에 가서 보았고 대통령 후보 토론이 있는 저녁에는 컬럼비아대학 부근의 바는 사람들로 만원이 되었다. 민주당의 존 케네디가 공화당의 닉슨후보를 근소한 차이로 누르고 당선되었을 때 미국의 여론은 텔레비전 디베이트 때문에 케네디가 승리했다는 평도 있었다. 닉슨은 부자 층이 내 세운 가난한 후보이고, 케네디는 빈곤한 사람들의 부자 대통령 후보라는 말이 있었다. 다시 말하면 닉슨은 부자를 대변하는 가난뱅이 후보였든 반면에 케네디는 가난한 노동자를 대변하는 부자후보라는 말이다. 그리고 케네디 대통령은 근로자를 위한 정책을 많이 수립하고 노동자와 농민의 복지혜택을 위한 입법에 적극적으로 힘쓴 반면, 닉슨은 백만장자 부유층의 이익을 보호하는 정책을 많이 세웠다는 사실은 역사책에 기록돼 있는 것이다.


케네디 대통령의 동생인 로버트는 민주당 정권에서 법무부장관을 지낸 후 대통령으로 출마하여 예비선거 유세 중 총탄을 맞고 사망했다. 그리고 셋째인 에드워드 케네디는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었으나 예비선거에서 낙선된 후 대통령 선거를 포기하고 상원의원으로 10여 차례 재선되고 반세기 동안 의회정치에 공헌했다. 그 결과 케네디 일가의 미국정치에 대한 공헌은 매우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그들에 대한 전기와 학술서적도 여러 권 출판되었다. 미국의 언론은 테드 케네디 같은 갑부의 아들이 무엇 때문에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위한 의료봉사정책을 세우고 또 빈곤층의 주택 문제를 해결해 주고 식생활을 보조해주는 부양정책을 꾸준히 밀고나갈 수 있었는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가난하고 어렵게 사는 이민자를 위한 정책을 꾸준히 밀고나간 빈민자의 대변인이었다케네디는 보수공화당 의원도 포섭하여 그의 신념을 실현했다. 유타출신 오린 해치 상원의원과 공화당 대통령 후보였던 매케인 같은 보수주의자도 자유주의(진보적)인 케네디 의원을 높이 평가했다.
양극화된 한국의 보수정치인도 진보주의자 케네디 상원위원의 정치인 모델을 한번 쯤 검토해 보고 실험해 볼 아량은 없는지 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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