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옥중서신

2009-08-27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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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숙(프린스톤 참빛교회 목사)

1970년대 말, 대학 신입생 시절 동숭동에 있었던 흥사단 아카데미는 사회 과학 독서 클럽이었다. 주로 정치사상 서적을 텍스트로 국내상황을 콘텍스트로 삼아 열정적이고도 진지한 토론을 가지곤 하였다. 한 해가 저물어가는 세모 어느 날 배분된 카피본은 이규호 교수의 ‘사람됨의 뜻’이라는 제하에 ‘인간은 사회적 삶을 통해 스스로를 형성해가는 열린 존재’라는 메시지가 초지일관 흐르고 있었다. 유신체제의 갑작스런 종식 후 민주화에 대한 기대에 부풀었던 ‘서울의 봄’도 잠시, 1980년 계엄령 선포와 함께 서울역 광장 시위가 시작되었다. 그 암울한 시절이 얼마간 지나고... 1987년 평화민주당의 김대중씨가 김영삼씨와 노태우씨와 함께 제 13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게 되었다.

나는 결혼 후 첫해가 저물어 가는 그 때에 투표권 행사를 앞두고 여론의 소용돌이 속에서 후보에 대한 좀 더 확실한 검증이 필요하였다. 그래서 당시 구입해서 읽은 책이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이 내란 음모죄로 사형선고를 받고 투옥 중 가족에게 보낸 서신을 모은 ‘옥중 서신’이었다. 그 책을 읽어내려 가면서 나는 그의 폭넓은 독서량과 함께 원융한 정신사조사를 접할 수 있었다. 가장 감동을 주는 그의 면모는 사해동포적인 맥락에서 이념, 철학, 경제 등 세계의 정신을 두루 섭렵하면서도 며느리를 향한 따스하고도 자상한 배려마저 감추지 않는 가족 사랑과 화초에 대한 염려와도 같은 소박하고도 순수한 정다움이 묻어나는 그의 인간적 면모였다. 나는 당시 체험적 믿음이 없는 상태여서 그의 리얼한 신앙적 체험고백이 다소 생경하게 느껴졌었다.

그러나 20여년이 지난 지금, 생의 절박한 위기의 순간마다 김 선생에게 다가오셔서 친히 임재와 말씀과 꿈속의 빛으로 나타나셨던 주님을 생각하면 가슴 저리도록 뭉클한 감동이 느껴진다. 그는 영적인 구원을 이루고 사회의 자유와 정의와 평화를 추구하는 행동하는 양심으로 살고자 부단히 노력하는 인생을 살았다. 그는 이 사회를 위한 봉사의 도구로 살아가는 것이 주님께서 맡기신 자신의 소명이요, 선교에 동참하는 것이라 굳게 믿었다. 그는 ‘정치는 살아있는 생물’이라는 어록을 남겼다 한다. 그의 이런 표현은 부단히 변하는 정치상황의 예측불허적 성격을 시사하는 것으로도 해석되지만 나는 이외에도 정치상황을 단순한 사건이나 도구의 일환으로 보지않고 유기적인 가치체계에 기반한 그의 목적적인 대인관이 소중히 담겨진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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