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연말 파노라마

2008-12-11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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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해를 마감하는 대학 동문 송년모임을 다녀왔다.

해마다 벌어지는 행사지만 올해는 지인들의 반가운 모습을 보며 마주잡는 손끝에 유난스레 강한 힘이 실린다.

서로서로 쉽지 않은 불경기를 이겨내며 모처럼 다시 만나 회포를 풀면서 나름대로 끈끈한 공감대가 형성된다.


특별히 자주 만나지 못해 애틋한 교류 하나 없어도 단지 동문이라는 이유 하나로 친근감을 느낄 수 있음이 이채롭다.

막연한 이민생활에서 동향이든 학교든 서로 다른 세월을 떠나 같은 울타리 안에 살았던 인연만으로 특별한 한마음이 되는 것이 때론 외로움을 이겨내는 작은 위안이 되기도 한다.

긴 생머리 날리며 20대 화려한 외모로 인기 높았던 곱디고운 동창의 두 눈가에 잡힌 세월주름이 그저 아름답기만 하고 열심히 절약하고 사느라 해마다 똑같은 정장을 입는 중년 신사에게서 아직도 젊은 청년의 풋풋함이 느껴지는 게 신기하다.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지난날의 향수를 서로 나누고 어깨를 토닥이며 보듬어주는 순간만큼 우리는 하나가 된다.

잘난 사람도 못난 사람도 없는 한 울타리 안에서 한 해를 정리하며 아쉬움을 접는다.

경제적으로나 가정적으로 건강하고 평탄하게 지내 평화로운 연말을 보내는 이나 투자마다 손실을 입어 현실이 버겁고 스트레스로 인해 건강까지 손상을 입어 답답해도 서로 충분히 위안을 받을 수 있는 그 자리가 엔돌핀처럼 느껴졌다.

올해는 유독 기복이 심했던 해라 고전 고전하다 숱하게 벌였던 사업체를 정리하며 힘겨웠을 때 곁에서 큰 위안을 준 가족의 사랑에 다시 이민 초기의 강한 의지가 생겼다는 인생경륜의 후일담에 가슴 훈훈해진다.


내년에도 부담 없는 한 해가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겠다는 다짐과 함께 흥겨운 음악을 배경으로 분위기가 고조되며 그 날 만큼은 모든 시름을 접을 수 있을 만큼 단순해진 미국생활이 다행스러웠다.

녹녹하지 않은 이민생활을 꿋꿋하게 버텨주는 것은 무엇일까?

본국에서처럼 정년퇴임할 때까지 직장에 얽매여 있다 은퇴한 후엔 새로운 자립이 힘들어 퇴직금만 믿다 의욕이 사라져 허탈해 하는 지인들을 보며 그래도 나이 상관없이 운전대를 잡으며 스스로 활동할 수 있는 도전이 주어진 이 땅이 훨씬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환차를 이용한 여윳돈을 한국에 보내 바닥난 증권에 투자한 그 대열에 끼지 않아도, 몇 년 간 한참 기승을 부린 부동산 사재기에 동참하지 않았어도 무모한 욕심을 조절할 수 있는 습관이 미국 살면서 서서히 늘어난 것에 감사한다.

그리 큰 고생하지 않고도 타이밍 잘 맞춰 재운을 걸머쥔 주변 사람들을 보면서 엇비슷하게 따라했다가 엉뚱한 결과를 몇 번 치르면서 그저 콩 심은데 콩 나듯 주어진 테두리에서 자신의 일에 충실하리라 다짐한 기억이 새롭다.

덤으로 얻어지는 행운에 매달리며 요행을 바라기보다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현실을 인정할 수 있는 여유로움이 조금씩 늘어남에 작은 평온을 얻는다.

늘 빗겨가는 경품 잭팟이 올해는 줄줄이 당첨되면서 바리바리 챙겨온 선물 보따리를 고마운 이웃에게 나눠줄 생각에 마음은 이미 부자가 된다.

모처럼 한껏 멋을 낸 동문들의 활기찬 모습이 내년엔 좋은 일만 생길 듯한 신선한 예감을 안겨준다.

내년엔 몇 개의 웃음 주름이 더 생기려는지 벌써 궁금해진다.

카니 정
콜드웰뱅커 베스트 부동산

(562)304-3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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