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칼럼/ ‘흑인대통령’의 탄생을 보면서

2008-11-07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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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영(고문)

미국 제 44대 대통령에 최초의 흑인대통령으로 버락 오바마가 당선한 것은 미국의 역사를 바꾸어 놓은 선거혁명이었다. 미국에서 흑인이 대통령이 될 것이라고는 불과 2년 전까지 그 누구도 상상조차 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오바마가 처음 대선에 출사표를 던졌을 때만 해도 젊고 경험이 부족한 그가 흑인이라는 인종적 약점을 극복하고 성공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많았다.

그런데 그가 대통령이 되었다. 감격적이기도 하고 충격적이기도 하고 경악할만한 일이기도 하다.미국에서 흑인이 받은 수난의 역사를 보면 비참하기 그지없었다. 1619년 아프리카에서 생포된 흑인노예들이 영국 최초의 식민지인 버지니아에 최초로 수입된 후 약 200년 동안 아프리카의 흑인들이 이 땅에 노예로 팔려왔다. 흑인노예들은 가축처럼 팔고 사고 부림을 받아 사람 대접을 받지 못하였는데 19세기 초반에 이 노예제도에 대한 찬반이 일어 1860년 남북전쟁이 발발했고 전쟁의 와중에서 링컨이 1863년 노예해방을 선언했다.


남북전쟁의 종결과 함께 노예제도는 폐지되었으나 흑인에 대한 사회적 차별은 여전하여 1963년 유명한 마틴 루터 킹목사의 민권대행진이 벌어졌다. 그런데 킹목사가 모든 인종의 평등을 꿈꾼지 45년이 지난 지금 오바마는 그 꿈을 넘어서 흑인대통령이 되어 미국의 지도자로 우뚝 섰다.오바마가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 대통령에 당선된 것은 변화를 바라는 민심을 휘어잡았기 때문이다. 미국은 그간 부시시대 8년 동안 대외전쟁의 부진과 경제 하락으로 국민들이 실망감과 무기력에 빠져 있었다. 특히 최근 발생한 금융위기와 경기침체는 오바마가 내세운 「변화」를 절실히 필요로 하게 되었다. 미국인의 75% 이상이 지금 미국이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면서 오바마의 당선은 대세를 이루었던 것이다.

2007년도 기준으로 미국의 총 인구는 3억163만인데 그 중 백인이 2억4,111만이고 흑인은 3,875만에 불과하다. 히스패닉이 4,550만으로 오히려 흑인보다 많고 아시안도 1,336만이나 된다. 그런데 어떻게 흑인인 오바마가 대통령에 당선될 수 있었을까. 물론 흑인 표가 뭉쳐서 지지했겠지만 다른 소수민족의 표를 많이 흡수했고 최대 다수 인종인 백인들의 표를 많이 얻었기 때문이다. 사실 오바마는 민주당의 전통적인 지지기반인 서민층과 함께 백인 지식층, 젊은이와 여성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흑인대통령」으로 불리는 오바마는 흑인으로서 대통령이 된 사람이지만 흑인의 대통령이 아니라 전 미국민의 대통령인 것이다. 흑인이 대통령이 되었다고 해서 미국이 온통 흑인판으로 될 수는 없을 것이고, 또 그렇게 되어서는 결코 안된다는 말이다. 그의 당선으로 인해 무너진 흑백의 경계를 그의 손으로 다시 만든다면 그 자신이 첫 희생자가 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만약 이번 대선과 같은 선거가 한국에서 벌어졌다면 과연 어떤 결과가 나타났을까.

한국의 선거에서는 정책의 차이보다는 혈연이나 학연, 지연 등 인맥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대선 후보가 어느 지역 출신이냐에 따라 지역마다 몰표가 쏟아져 나오는데 백인과 흑인처럼 인종이 다르다면 소수인종은 아예 발을 붙이지도 못하게 될 것이다. 다인종 사회인 미국에 아직도 인종차별과 편견이 남아있지만 그 차별과 편견은 극복될 수 있다는 점을 오바마의 당선이 입증해 주었다.미국에 사는 우리 소수민족은 백인 사회에서 이른바 유리천정에 부딪혀 한계를 느낀다고 한다.

정계나 학계, 재계 등 고위직과 전문직에서 위로 올라가다 보면 보이지 않는 유리천정에 부딪혀서 더 이상 올라가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평소에는 크게 느끼지 못하던 인종차별의 벽을 절감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흑인인 오바마는 미국의 최고 지도자인 대통령이 되었으니 미국의 유리천정이란 것도 별 것이 아니다. 개인의 탁월한 능력과 끈질긴 노력으로 뚫고 올라갈 수 있는 천정이라는 것이다.

우리 한인은 미국내에서 미약한 소수민족에 지나지 않지만 그 때문에 미국 각계에서 지도적 위치를 차지하지 못한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군계일학’이라는 말이 있듯이 탁월한 지도력이 있는 한인 한 사람이 수많은 미국인을 이끌어 갈 수도 있다. 「흑인대통령」이 나왔는데 미래에 「한인대통령」이 탄생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는 없다. 오바마의 당선이 우리에게 바로 이런 충격을 주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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