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가을 산책

2008-11-04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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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희((교육가/수필가)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조깅보다는 산책이라는 표현을 나는 더 좋아한다. 일찌기 나의 건강 비결은 맨손체조(보건체조)와 산책(걷기)이라고 천명한 바 있지만 모두들 그것을 웰빙 또는 다이어트의 범주 안에 넣고 있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것이다.달리는 세월 속에서 어느덧 불혹(不惑)과 지천명(知天命)을 지나 이순(耳順)의 마지막 고갯길을 헐떡이며 내려가고 있는 나이로는 그것이 제일 좋은 보약이라는 것을 많은 사람들도 알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내 자식들을 포함하여 알면서도 실천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말씀이 생활과 일치되지 않는 크리스찬의 삶과 흡사하다고 말하고 싶다.

젊은 나이에 혼자 되어 반려자 없이 40년 넘게 산 세월 동안에 보기에는 멀쩡해도 커피 한 잔 같이 마셔줄 사람 없고, 같이 산책할 이 없으며, 함께 대화할 상대가 없어서 독백(獨白)만 씹다가 곪아버린 사람이기에 아이들로 인해서 알게된 한 지인이 있어 오늘도 산책의 시간이 마냥 즐겁고, 발길이 더욱 가볍기만 하다.같은 스트릿에 사는 그녀는 그의 남편이 지상사 직원이기 때문에 일년만 더 살다가 한국으로 돌아간다고 했다.나는 아이들의 할머니로서, 그는 아이들의 엄마로서 만난 사이지만 우리는 세대 차이를 훨씬 뛰어 넘는다. 자녀 교육에 대한 의견과 정보 교환, 아이들의 버릇과 성격, 아이들이 먹는 좋은 간식과 식구들의 먹거리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대화는 참으로 무궁무진하다.


어찌 그 뿐이겠는가.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도 퍽 흥미롭다.
요즈음 미국발 금융대란에서 시작하여 미국 대통령 선거에 대한 이야기, 한국에서의 쌀 직불금 문제, 증권과 환율의 널뛰기 장세, 그 속에서 환차액을 노려 부자가 되었다는 아무개의 이야기, 그리고 어느 배우의 자살사건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기만 하다.프랑스인 베르타르 올리비에르가 실크로드를 걸어서 횡단한 후에 써낸 그의 저서 ‘나는 걷는다’에서 “어떤 종교든 신도들이 순례에 오르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홀로 걸으며 생각을 하
는 동안 근본적인 것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는데, 실크로드 1만1,000km를 걸어보지 못한 나로서는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에는 도달하지 못했을지라도 오래동안 혼자 걸으면서 독백을 좋아했고 그것을 즐기면서 세월을 보냈다. 혼돈된 질서 속에서 지혜를 짜내어 질서를 회복하고 나름대로 논리를 전개하여 결론을 내렸고 또 무한한 공상의 나래를 펴며 곤혹의 사색 속을 한없이 헤매이곤 했다.

요즈음 누군가와 함께 걸으면서 주고 받는 자질구레한 이야기들이 오히려 우리 생활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만큼 나 자신이 현실적인 인간이 되어버린 것일까.아무튼 요즘 우리가 주고 받는 대화는 해도해도 끝이 없어 마치 그 끝이 보이지 않는 현재의 경제대란과 같고, 우리가 사는 동네의 이 스트릿에 우람한 나무가지에서 떨어져 산처럼 쌓인 낙엽처럼 수북하기만 하다. 나는 지천으로 나뒹구는 낙엽을 밟으며 이 가을 거리를 산책할 때가 하루 중에 가장 행복한 시간이 아닐까 한다.아무래도 사계절의 산책 중에서도 가을 산책이 가장 운치가 있고 멋있는 산책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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