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백년도 살지 못할 인생인데

2008-11-03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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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휘(언론인)

돈 미겔 루이스는 ‘내가 말을 배우기 전 세상은 아름다웠다’는 책에서 이런 말을 했다.“백년을 산다고 해도 육체의 삶은 무척 짧다. 이 모든 사실을 깨닫고 나서 나는 사랑하는 사람들과 부딪치느라 내 시간을 낭비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나는 그들을 즐기고 싶다. 그들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를 알아내려 하기보다는 그저 있는 그대로의 그들을 사랑하고 싶다”고.

지구촌에는 230개의 나라에 68억의 사람들이 살고 있다. 대한민국, 좁은 땅에도 4,800만의 사람들이 붐비고 있다.누구나 사는 동안 이런 저런 관계로 많은 인연을 맺는다. 나에게 생명을 주고 핏줄을 함께 나눈 부모 형제, 유치원에서부터 대학에 이르기까지 배움의 터에서 알게된 많은 동창생들, 밥벌이 하며 만난 직장 동료들, 나라의 부름을 받아 병영에서 생사고락을 같이 한 군대 전우들, 사는 보람과 멋을 즐기기 위해 모인 동호인들... 헤아리자면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있다.그러나 막상, 오늘 나의 주변을 살펴보면 노상 만나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음을 알게 된다.
아무 때나 전화할 수 있고, 마음 내키면 언제라도 불러낼 수 있는 사람은 열 손가락이 모자라지 않을 것이다.


시쳇말로 가장 친하고 좋아하는 사람, 서양식 표현으로는 이른바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그런 사람들 사이에 묘한 갈등과 부딪침이 많다는 사실이다. 촌수가 없다는 가장 가까운 부부 사이가 대표적 예가 아닐지 모르겠다.그도 그럴 것이 자주 만나는 사람과는 많은 말을 해야 하고, 같이 해야 할 행동이 겹치기 때문이다. 거기다가 인간의 내면세계는 철새나 맹수들처럼 리더에 의해 일사분란하게 행동하는 자연의 질서가 지배하는 세계가 아니라 각자 주관이 있고 생각이 다른데다 자존심이란 것까지 끼어있어 사고와 행위의 채널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것이 가장 친한 사람끼리 자주 부딪치는 이유이다.자주 부딪치다 보면 가슴에 상처만 남는다. 그 상처를 없애려면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낭비해야 한다. 우리는 이승에서 사는 동안 사랑할 시간도 모자란다. 백년을 산다고 해도 인생은 결코 긴 것이 아니다.

70을 넘긴 부모를 둔 자식은 부모가 언제나 이 땅에서 자기와 생을 같이 할거라 생각하면 안된다. 돈 번 다음에 잘 모시겠다고 마음먹는 건 큰 착각임을 알아야 한다. 부모가 떠난 후에 자신이 얼마나 이기적이고 못된 인간이었었나를 두고 두고 자책해도 이미 때는 늦은 것이다.
일상에서 서로 불편을 느끼는 일은 작은 데서 비롯되기 십상이다. 밥 먹고 잠자는 일, 모이고 잡담하는 일, 구경하고 운동하는 일, 외식하고 여행하는 일... 나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처음으로 부부동반 외국 나들이를 갔을 때 우리는 꽤나 다퉜던 적이 있었으니까. 짐을 챙길 때부터 기념품 하나 사는 것까지 서로 간섭이 지나쳐 결국 기분을 잡치는 지경에까지 다달았다.

여행이란 게 자칫 사람들을 그렇게 만들기 쉽다는 걸 깨달은 건 한참 후였다. 신경을 끄고 넌즈시 바라보며 나를 객관화시키는 훈련을 거치고 나니 요즘엔 한결 자유스러워졌다.이런 이치가 어찌 여행에만 국한되겠는가. 가까운 사람일수록 결점이 잘 보이는 법이다. 그러니 피장파장, 그대로 놓아두자.앞으로 내가 얼마를 살 수 있나를 헤아리며 하루가 참으로 소중하다는 생각이 든다면 지금 나와 가까이 있는 사람에 대해 그 존재의 의미를 새롭게 생각해 봐야 하지 않겠는가.
그와 함께 할 시간이 길게 남은 게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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