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가을은 희망의 계절

2008-10-28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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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중돈(법정통역)

내가 살고 있는 곳은 뉴저지의 서북쪽 고원지역에 있는 호수 앞이라서 가을 단풍이 뉴욕보다는 거의 한달 정도 빠르다. 그래서 이곳은 해마다 10월 셋째 주말이 그 절정이라서 이 날만은 내가 가장 아끼는 사람들을 초대해서 한 해의 마지막 바베큐 파티를 하기로 접어놓은 날이다.

올해에는 그 초대손님이 예년과는 달리 가족 위주의 파티가 되었다. 며느리의 생일이 주말인 이 날과 가까워서 며느리의 생일 파티를 열기로 한 것이다.말이 며느리의 생일 파티지만 사실은 곧 돌날이 가까워 오는 손자가 보고 싶어서 갖다 붙인 핑계인 셈이다.단풍 철이 들면 내게 가장 먼저 찾아오는 생활의 변화가 있다. 여름 한 철 주말마다 골프장을 쫓아 다니느라 가까이 하지 못했던 붓을 다시 드는 일이다. 붓을 들면 언제나 즐겨 쓰는 선조(宣祖)때의 학자 송강(松江) 정철의 가을 밤(秋夜)라는 한시가 있다.蕭蕭落葉聲 錯認爲疎雨 呼童出門看 月掛溪南樹 - “우수수 낙엽 지는 소리/가랑비 소리인지 헷갈리네/아이 불러 문밖에 보고 오라 일렀더니/개천 남쪽 나무 가지에 달이 걸려있다 하네”나는 이런 송강의 풍류에 너무 반해버린 나머지 해마다 가을이면 이 시를 쓴 내 작품을 가까운 친지들에게 선물하고 있다.


내가 이곳으로 이사 오던 20년 전에 어느 환경보호 단체에서 기부금을 받은 답으로 보내준 몇 가지 나무 묘목이 있었는데 이 중에 ‘튜립 트리’라는 별명을 가진 나무를 한 그루 심었다. 이제 스무 살이 되는 이 나무는 그 키가 서른 자나 되었고 봄이면 그야말로 튜립같이 생긴 수많은 꽃을 피우고 있고 가을이 되어 낙엽 철이 되면 한 뼘이나 되는 넓은 잎이 마치 어릴 때 조국에서 보아오던 오동나무 잎사귀 같이 깨끗하고 넓직해서 이것들을 책갈피에 넣어 말렸다가 이 잎에 이 송강의 ‘가을밤’ 시를 써서 후레임을 만든다.이런 가을 작품을 만들기 시작한지도 어언 10년 정도는 되었는데 언제나 나의 글씨가 마음에 들지 않아 불만이긴 하지만 몇 해 전에 쓴 작품이 제법 마음에 든다고 남겨둔 것을 지금에 와서 보면 아주 불만스러운 것은 나도 모르게 글 재주가 느는 것이라 생각되어 그런대로 흡족해 하고 있다.

직장의 중국인 동료에게 주는 선물로는 당(唐)나라 때의 시인 장적(張籍)이 쓴 추사(秋思)라는 시를 쓴다. 洛陽城裏見秋風 欲作家書意萬重 復恐忽忽設不盡 行人臨發又開封 - 낙양성 아래 가을바람이 불어/집에 붙일 글을 쓰자니 만 가지 생각이드네/서둘다 할 말을 다하지 못했으랴/행인이 떠나려는 참에도 봉투를 다시 뜯네.한 해를 마감하기 몇 일을 남겨둔 지금 만나지 못했던 옛 친구,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을 생각해 본다. 그 중에는 먼저 저 세상으로 떠난 친구들, 선배들 때문에 가을은 한층 쓸쓸해지기도
한다. 그러나 가을은 금방 찾아오는 봄의 희망과 새해의 꿈을 가꾸는 희망의 계절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가을에는 뜻밖에 찾아든 경제위기 때문에 부풀어야 할 새해의 꿈을 오그라들게 한다.

많은 유학생과 기러기 가족들이 경제적인 어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짐을 싸야 할지도 모른다는 안타까운 소식도 들린다.10년 전 외환위기 중에는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가정불화가 많은 탓이었던지 법원에 입건되는 가정폭행 사건이 눈에 뜨이게 많았었다. 이 가을에 시작된 경제위기도 아니나 다를까 법원에서도 체감하게 된다. 가정폭행사건과 미성년 소년범 사건의 수가 늘고 있다.생활이 어려워지더라도 더 한층 사랑으로 가족을 껴안아 줄 아량이 필요한 때이다. 우리 모두 사랑으로 이 어려움을 이기는 지혜를 배웠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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