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휴양지에서 만난 사람들

2008-10-25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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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만옥(전 고교 역사 교사)

보카치오는 그의 저서 ‘데카메론’을 통해 기독교 출현 후 1300년 동안 신 찬양 얘기만 듣고 살던 중세의 교인들에게 인간 자신의 얘기를 들려줌으로써 신 중심의 사고를 탈피하려는 문예부흥의 여명기를 장식했다.
14세기 흑사병이 전유럽을 덮쳐 신의 대리인들 조차 죽음의 공포에 떨던 시절, 이를 피해 7명의 여인과 같은 또래 3명의 젊은이가 기도 대신 웃고, 마시고, 떠들어대는 것이 이 병에 대한 통치약으로 믿고 10일 동안 오간 100편의 얘기가 실려있다.

정직치 못한 경영자에 의해 야기된 금융위기에서 오는 우울한 생활을 피하려는 인생 경험이 충만한 3쌍의 부부가 뉴욕을 떠나 지중해 연안에 잘 꾸며진 식당에 앉아 준비도 없던 얘기를 시작한다.“미국에 오기 두달 전 중매로 만나 준비도 없이 시작된 새로운 세계에서의 저의 결혼생활은
많은 어려움을 겪게 했어요. 아빠(남편)가 저를 아껴주는 동안 미술학도인 저는 경험도 없이 가게를 운영하며 키운 딸이 나이 30이 됐어요. 은퇴 후 여가선용을 위해 비싼 카메라를 준비한 아빠는 사진 찍는 일에 열광이지요. 남들과 대화에 익숙치 못한 것이 흠이어서 걱정이었는데 뜻밖에 품위있는 분들을 만나 즐거운 여행이 됐어요.”


“여행을 할 때면 의례껏 남편의 비행기표와 여권을 자기 것과 함께 챙기는 친구가 지난 번 여행 때 겪은 얘기죠. 출발시간이 거의 되어 탑승이 끝났는데도 전과 달리 서류를 몽땅 가지고 있는 남편이 안 보이는거예요. 초조 속에 기다리다 승무원의 도움으로 간신히 탑승은 했어요. 아내의 서류까지 손에 든채 홀로 탑승해 옆의 빈 자리가 누구의 것인지도 관심 없이 창문밖을 내다보고 있는 남편을 본 아내의 감정이 어떠했을까요. 지금껏 함께 살아온 것이 ‘천생연분’이어서가 아니라 ‘평생 원수’로 살아온 부부의 표본이 아닐까요.”

“저희가 학비는 물론 세끼 식사조차 먹기 어려웠던 학창시절, 부유한 부모를 둔 그는 어려움을 경험할 필요가 없는 남친이었어요. 졸업 후에는 아버지의 증권사업을 이어받아 성공을 거듭해 젊은이가 돈을 너무 많이 번다고 소문이 날 정도로 재산을 불렸어요. 욕심이 지나쳤기 때문이었는지 미국으로 피신해 살면서 친구와도 연락을 끊어야 했어요.숨어 사는 동안 그의 유일한 친구인 컴퓨터와 마주앉아 바둑을 두는 것이었고 그러다 심장마비로 인해 병원 문턱에 들어서 보지도 못하고 죽었을 때 나이가 60세였어요. 건실과 근면의 자세로 생활하며 여가를 선용해 가며 사는 것이 즐거운 인생과 장수를 위한 만병통치약임을 확인시켜 주는 얘기가 아닐까요.”

고희에도 일에 지칠 줄 모르는 아내의 말 속에는 벌어놓은 돈 써보지도 못하고 짧은 인생을 살다 간 남친을 애도하는 뜻도 함께 담겨있다.
“우리 3쌍의 부부가 약속은 없었지만 이렇게 같은 휴양지에서 만나 각자의 지혜를 말하고 들을 수 있는 시간을 가진 것은 우리 모두가 신의 보살핌 속에 살고 있다는 구체적 증거가 되었지요. 함께 한 10일간의 여행이 끝나갑니다. 건강을 위해 함께 건배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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