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우리 말씨에 담긴 종교 정신

2008-10-24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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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환(목사)

한국 사회는 언제부터인지 우리의 국어와 국사를 소홀히 여겨왔다. 근래에는 초등학교 때부터 한자와 영어를 집중적으로 가르쳐야 한다는 주장이 들려온다. 한국인이면 중국과 일본의 한자 권을 넘어서 세계화 시대의 영어권을 다시 도약해야 하는 일을 알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미국으로 유학을 오는 젊은이들이 영어로 예배하는 교회를 찾아다니는 것을 보는 것은 충격에 이어 심각하기만 하다.

이러한 정황에서 역사 속에 우리의 말씨의 상징성과 초월성에 따른 우리 언어의 사유가 무슨 의미가 있으며, 훈민정음 ‘한글’이 유네스코에 세계 문자유산으로 유일하게 등록된 가치가 무엇인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본래 우리 언어의 상징성의 원초적 언어는 북방계(우랄알타이어)의 “가르다”과에 뿌리를 둔다. 여기서 물, 불, 칼, 말, 글, 길이 파생되고, 숱한 선사시대가 지난 후 음운도치(音韻倒置) 5기인 원시언어 말기에 ‘거룩하다’, ‘가르치다’가 정립된다. 삼한(三韓)시대에서는 천군(天君)이 산마루에서 여러 부족국가의 왕을 거느리고 제사를 드리는 것을 ‘거룩하다’라고 했다.


천군이 솟대 아래 생명을 구하는 사람들에게 천손(天孫)의 길로 바르게 이끄는 것을 ‘가르치다’라고 했다. 제사장인 천군을 임군보다 우위에 두고 국가 정치와는 엄격히 구별하며, 천리(天理)의 주재인 절대자를 ‘하나님’(hanboulim)으로 고백한 시대이다.그 후 1300년이 지나서 중세기에 세종대왕의 훈민정음 한글 창제가 우연한 기회에 이룩된 것이 아니라 천군 천손 사상의 뿌리에서 온 것임을 알아야 한다.

지금으로부터 6500년 전에는 일본어와 한국어는 서로 같았으나 일본인들은 상징적인 말이나 초월적인 말보다 현실적인 말씨로 살아왔다. 이런 면에서는 중국인들도 마찬가지이다. 중국인들이 하나님을 상제(上帝)로 부르는 개념은 임금의 죽은 상왕(上王)의 혼령을 말한다. 일본인들의 가미사마(神)는 윗사람의 개념으로 되어있는 실정이다. 한자문화권의 중국인들과 일본인들은 눈에 보이는 현실에 치우쳐 학문에서도 실학이나 양명학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다. 성리학이 있었다고는 하나 그들은 인성(人性)의 기(氣)에 치우쳐 초월성의 천리(天理)를 이해하지 못했다. 이에 반하여 유교사의 금자탑을 이룬 이황(李 滉)의 이기호발(理氣毫髮) 사상은 인성의 기를 넘어서는 천리가 세상에 나타난다고 했다.

이 황의 입장이라면 그리스도의 진리가 말씀으로, 세상에 기(氣)로 나타났다고 말하게 된다. 이러한 위대한 학자가 우리에게 배출된 것은 6500년의 유구한 말씨의 흐름과 선조들이 구사한 종교언어의 사유가 있어서 나타난 결과라 하겠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가 중국인이나 일본인보다 폭넓은 초월적인 종교언어를 가진 것은 당연한 일이다.그러나 이 황 이후 5세기가 넘은 오늘에 이르러 한국의 젊은이들은 천리에 대한 질문이나 이
(理)를 찾는 학문에는 관심이 없다. 종교를 사회의 한 조직으로 보고 그리스도를 인성의 연장으로 본다. 세계화 시대에 무엇을 지켜야 할지 모르고 떼지어 모인 무리들 속에서 안위를 찾는다.

오늘의 한국 젊은이들이 기억할 것이 있다. 중세기의 종교가 쓰러지고, 세계가 어두웠을 때에 종교 개혁자들의 핵심사상은 라틴어를 떠나 모국어로 진리의 말씀을 선포하고 모국어로 예배하는 것이었다. 이로써 나라를 건지고 세상을 구하지 않았는가? 현대 신학자 폴 틸리히(Paul Tillich)도 “신앙고백과 신학은 모국어로 하는 것이다”고 말했다. 종교 행위가 부모로부터 전승된 언어를 떠나서 이루어져도 아무런 감각이 없는 것은 우리의 미
래에 심각한 일이 된다. 종교와 역사는 뿌리 깊은 말씨에서 시작되고 이어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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