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말의 문화

2008-09-08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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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휘(언론인)

몇 해 전, LA에서 한국인 교민들이 싸우면서 홧김에 ‘죽인다’, ‘불 지르겠다’는 말을 했다가 경찰에 구속된 적이 있었다. 보석금 5만 달러를 물고 풀려나긴 했지만 현지 경찰은 이들을 예비 살인과 예비 방화 혐의로 형사 입건한 것이다. 세계가 하나의 지구촌으로 좁아지고 있는 21세기에 아직도 이처럼 동서양 언어문화 갈등의 골이 깊다니 하나의 해프닝으로 돌리기엔 너무 어처구니가 없다. 왜냐하면 우리나라에서 이와 비슷한 욕지거리를 듣는 것은 흔한 일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욕 말에는 남녀 생식기를 들먹이는 경우와 죽인다는 말을 쓰는 예가 많다. 그것도 그냥 죽이는 게 아니다. 몽둥이로 때려죽일 놈, 호랑이가 물어갈 놈, 주리를 틀어 죽일 놈, 심지어 간에 옴이 붙어 긁지도 못하고 죽을 놈... 낱말의 뜻대로 따지자면 참으로 무지막지하고 몸서리쳐
지는 표현이지만 예나 지금이나 우리는 이런 욕쟁이를 관아에서 잡아가거나 형사 입건했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요즘 같으면 인격이나 명예훼손으로 고발 대상이 될 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건 진짜 살의가 있어서가 아니라 순간의 원초적 감정을 직설적으로 표출하는 ‘과장어법’의 산물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예로부터 동양에서는 말의 과장이 심했다. 이 과장법에 죽음이라는 단어가 들어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죽음은 모든 것의 최후이고 가장 혹독한 것이며, 그리고 최고의 강조이고 극치를 대변하는 용어이므로.

죽음이라는 말을 접미어로 넣어 말의 뜻을 강조하는 성어(成語)는 많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도 우스워 죽겠다, 놀라 죽을뻔 했다, 미워 죽겠다, 예뻐 죽겠다는 말을 스스럼 없이 사용한다. 소살(笑殺), 경살(警殺), 투살(妬殺)이라는 단어가 당시(唐詩)에 자주 나오는 걸 보면 이 말을 사용
한 지는 꽤 오래된 것 같다.우습고 예쁘다는 감정 표현에까지 죽음이란 말을 붙이고 있으니 이럴 때 쓰이는 죽음은 절대로 악의가 아님을 알 수 있다. LA에서 한국인의 죽이겠다는 말과 뉴욕 암흑가 갱들의 죽이겠다는 말은 그 숨은 뜻에 천양지차가 있다. 그래서 이번 일은 표현문화의 차이로 돌려 보석금으로 해결은 된 셈이지만 어쩐지 뒷맛이 씁쓸하다.이쯤 되면 우리의 그릇된 언어습관을 다시 생각해 볼 때가 아닌가 싶다.

국제화란 세계 곳곳에서 여러 나라 사람들과 한데 어울리는 삶의 방식을 말한다. 사람이 서로 만나서 하는 일은 주로 말로 이루어진다. 말을 곱게 하는 것은 비즈니스를 잘 하는 것이요, 격식을 갖추어 말을 잘 하면 외교를 잘 하게 된다.누가 들어도 닭살이 돋을 역겨운 말, 요즘 유행하는 괴담에나 나옴직한 무시무시한 말은, 특히 문화정서가 다른 외국인에게는 굉장한 역반응을 일으킬 수 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말은 그 사람의 얼굴이요 인격이다. 처음 만나는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은 우선 외모에서 오는
인상이다. 그러나 잠시 시간이 지나고 나면 다음은 상대방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이다. 말에는 발언자의 지적 수준과 경륜과 성품이 하나 하나 묻어나오기 때문이다.

똑같은 내용을 표현하는데도 말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듣는 이의 반응은 달라질 수 있다. 어떤 어휘를 사용하며 어떤 방식으로 표현하느냐에 따라서 말이다.바르고 고운 말을 뒷받침해 주는 가장 든든한 보증은 정직이라는 것도 새겨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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