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하늘 보기

2008-09-03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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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태(시인)

구름이었다. 그것들은 하늘을 가리는 구름이었다. 하늘이란 항상 푸르고 맑을 뿐, 그 맑은 하늘에 잡티 하나 섞이기를 용납하지 않았다. 그것을 위반하고 우리는 살았다. 나에게 있어서는 문학도 한 점의 구름이 되어 하늘을 가렸고, 돈도, 명예도, 심지어는 쉬지 않고 내가 생각하는 관념이나 철학도 푸른 하늘을 가리는 한 점의 구름이었다. 하늘이 보이지 않고 하늘을 모르면 불행한데 그걸 모르고 하늘 가리는 짓만 하고 살았다. 하늘이 웃었을 것이다.

철학을 알아도 사상을 모르면 불행하고, 성경은 알아도 성령을 모르면 불행하다. 사랑은 알아도 희생을 모르면 불행한데 사상을 모르고 성령을 모르고 희생을 모르고 살았다.가난한 사람이 부자들 보다 평화를 알고 실천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을 모르면 가난한 사람들은 불행하다.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가나안’ 땅, ‘가나안’이란 그 말을 줄여서 발음을
하면 ‘가난’이란 말이 된다. 가나안 사람들이 생활의 환경이 여유로워지고 황금의 위력을 알자 가난할 때 보아왔던 맑은 하늘이 두 눈에서 점점 멀어졌고 하늘도 멀리 떠났다. 그리고 질시와 투기와 싸움이 온통 그들의
마음을 차지하였다.


평생 퍼질러 호강하면서 먹고 살아도 남아돌 재산인데 재벌들의 형제는 왜 형제들끼리 싸울까? 육이오 전쟁을 전후해서 먹을 것조차 귀했던 대한민국 사람들이 형제들과 이웃들과 평화를 누리며 보아왔던 맑은 하늘이 산업이 발달하고 생활이 윤택하여지자 그 때의 사람들은 맑은 하늘을 다 잊어버렸다. 아니 다 잃어버렸다. 그리고 싸운다. 맑으면 가려지고 맑으면 더러워지기 쉬운 위험, 욕망과 욕심이란 것이 항상 구름이 되기 때문이다.
사람에게는 고향과 본향이 있다. 고향이야 누구든지 멀리 두고 싶지는 않겠으나 사정에 따라서는 떠날 수도 있고, 때에 따라서는 버릴 수도 있다. 그러나 본향이란 떠날 수도 버릴 수도 없는 것이다. 처음이요, 과정이요, 끝이기 때문이다. 본향이라는 그것이 우리와 동행하는 하늘이기에 사람은 하늘에서 와서 하늘을 이고 살다가 하늘로 돌아간다.

하늘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부활이 없다. 다시 말해서 출생과 인생살이 수난과 죽음은 누구에게나 있으며 하늘을 모르면 바라고 염원하던 부활은 없다. 부활의 기대와 부활의 약속은 자신이 발견하고 지켜야 하는 항목이기 때문이다. 하늘의 내용을 모른다거나, 하늘의 내용을 따르지 않는 사람이 하늘에 소속된 사람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하늘의 내용은 간단하나 지키기가 쉽지 않다. 윤리라든가, 도덕이라든가, 질서라든가, 배려라든가, 사랑이란 것들이 하늘의 내용이라 개념상 이보다 더 쉬운 것은 없지만 실천을 한다거나 지켜내기가 쉽지가 않다. 하늘은 하늘의 내용을 지키는 사람들에게는 항상 자비하지만 하늘의 내용을 지키지 않는 사람에게는 항상 두려운 것이다. 죄인도 하늘이 어떤 것인지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부활을 보여주기 위하여 고통의 십자가에서 뛰어 내려오지 않고 죽음의 길을 택했던 예수의 하늘보기 그 눈동자, 하늘이 무엇인가를 알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아브라함이 하느님의 요구 한 마디에 엎드려 따르는 믿음도 훌륭하였지만 하늘의 모든 내용을 발 품으로 순종한 예수는 더욱 훌륭하였다. 선한 논리가 결여되고 무자비한 행동만이 생활을 윤택하게 할 수 있다고 믿는 현대인들의 종착지는 어디일까?
현대는 불안하다. 이익이 따르지 않으면 사랑도 없고, 명예가 따르지 않으면 행동도 없는 현대, 인간의 사고와 행위가 모두 구름이 되어 하늘을 가린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지독한 문학도 하늘이 보일 만큼 엷게 썰어 적어도 하늘이 내 마음에 비춰지도록 해야겠다고 다짐을 한다. 지금의 생활보다 여윌는지는 몰라도 돈에다가 충혈된 눈을 부라리기 보다는 하늘에서 허락한 만큼에 만족하면서 하늘을 바라보아야겠다고 다짐을 한다.작은 먼지도 쌓여서 굳으면 돌과 같이 되고 작은 돌도 구르면 발길에 채여 가는 길을 험하게 한다. 아! 그러나 이것이! …알고 있는 이 쉬운 이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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