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칼럼/ 지족자부(知足者富)

2008-08-30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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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욱(논설위원)

만족이란 끝이 없는 것 같다. 끝이 없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집도 절도 없이 살던 사람이 초가집 한 칸을 얻어들어 살게 되었다. 한참 살다 보니 옛 일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기와집에 살고 싶어 한다. 이렇게 저렇게 하여 기와집으로 이사해 살게 되었다. 기와집에서 좀 살다보니 대궐 같은 집에서 살고 싶어진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리 저리 하여 대궐 같은 집에서 살게 되었다. 대궐 같은 집에서 좀 살다 보니 궁궐 같은 집에서 살고 싶어진다. 궁궐 같은 집에서 살다 보니 그것도 만족스럽지 않다. 궁궐 하나로 만족하지 못한다. 이번에는 수단 방법이 아니라 갖은 술수를 다하여 궁궐 같은 집을 수 없이 짓는다. 그런데 그 사람, 다 지어놓고는 명이 다하여 죽는다.

산에서 가끔 개미들을 본다. 개미들은 사람이 자기들을 보고 있는 지 상상도 못할 것이다. 개미보다 수십만 배 더 큰 덩치를 가진 ‘사람’이 자기들을 내려다보고 있는 줄 안다면 기절초풍이 아니라 그 자리에서 죽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사람이 내려다보는지 안 보는지 아랑곳없이 열심히 줄을 따라 이동하며 먹을 것을 찾아 헤맨다. 만족을 찾아 헤맨다.
한 번은 애벌레 하나가 개미들한테 걸렸다. 애벌레는 나뭇가지에서 떨어졌나보다. 개미보다도 수십 배 더 큰 애벌레다. 개미들이 애벌레의 앞뒤를 물어 끌고 간다. 애벌레는 끌려가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친다. 결국은 포기하고 만다. 개미들이 끌고 가는 데로 끌려가고 있는 먹이가 된 애벌레다. 개미들은 만족한다. 개미들은 이 광경을 사람이 보고 있는데, 알고나 있을까.


60억여 명의 사람들이 지구 안에서 모두 ‘만족한 삶’을 살아보려고 열심히 무엇인가를 찾아 헤매고 다닌다. 그런 지구 안의 사람들 하나하나가 개미처럼 보여 지고 있는 거대한 무엇이 있다고 치자. 사람의 눈에는 개미가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듯 그 거대한 무엇은 보이지가 않는다. 보이지가 않는 것이 아니라 감도 잡지 못한다. 개미의 만족은 애벌레를 잡아 처소로 끌고 가 양식으로 삼는 데 있을 것이다. 최고의 만족, 끝이 있는 만족일 것이다. 애벌레를 잡아 가던 그날 개미들은 지상 최대의 잔치를 벌일 것이다. 그냥 그것이 그들의 만족일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의 만족은 무엇인가. 사람이 사람을 애벌레처럼 먹이로 하여 삼켜 버리고도 또 삼키려하는 끝이 없는 욕심이 사람의 만족이 아닐까.

끝이 없는 만족은 불만족(不滿足)의 연속이다. 불만족이란 욕심처럼 본능인가. 끝없이 이어지는 불만족을 끊어버리는 길은 없을까. 있다. 죽음이다. 죽으면 욕심도 불만족도 모두가 끝이 난다. 초가집에서 궁궐 같은 집으로 옮기고도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처럼 세상의 부귀영화는 죽음이란
두 글자 속에 다 파묻혀버리고 만다. 만족도 끝이 난다. 사람과 개미에겐 만족의 차이가 있을 수 있다. 개미는 하늘을 보지 못한다. 땅만 본다. 사람은 하늘을 보는 만족이 있다. 개미는 자신들을 내려다보는 사람이란 큰 존재를 인식하지 못한다.

사람은 개미를 인식하는 만족이 있다. 아니 개미도 사람을 인식할는지 모른다. 사람이 개미를 인식할 때, 개미는 인식의 대상이 되어 사람 속에 이미 들어와 있으니 그렇다.장자가 꿈속에서 나비가 되는, 혹은 나비가 꿈속에서 장자가 되는 물화현상(物化現象)이 일어날 때 둘은 동시에 만족할 수도 있다. 그러나 ‘물화현상’, 이것까지도 사람이 사람의 만족을 위해 만들어 놓은 이론에 불과할 수 있다. 사람이 개미를 볼 때의 개미의 만족은 애벌레를 먹이로 하여 끌고 가 먹어야 한다는 그들의 본능 속에 있지 않을까. 만족 속에서는 불행이란 있을 수 없다. 어떤 환경에서 어떻게 살아간들, 만족하여 살아가고 있다면 그 사람은 행복하다. 부자란 노자가 얘기한 ‘지족자부(知足者富)’, 즉 “족함을 아는 자가 부자”다. 주어진 조건이 어떠하든, 만족하여 즐겁게 살아가는 사람은 모두가 다 진정한 부
자다. 하지만 죽기 전에는 만족의 끝을 모르는 존재가 인간임을 어찌하랴.

불만족은 욕심과 같이 간다. 불만족과 욕심을 마음 밖으로 내 몰수만 있다면 인간은 곧 성자가 될 것이다. 개미는 사람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분명 개미를 내려다보는 사람은 있다. 사람이 개미보다 나은 존재로서의 만족을 가질 수 있음은 인식의 대상을 인식자인 인간이 함께 보고 느낀다는 것이다. 초가집에 살던 사람이 궁궐 같은 집에 얼마든지 살 수 있다. 문제는 만족감의 망각이다. 작은 것이라도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 오늘을 함께 만족해야 한다. “더, 더, 더” 하다가 사람은 명이 다하여 세상을 떠난다. 이때래야 만족의 끝은 오는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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