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칼럼/ ‘아메리칸 드림’의 허상

2008-08-08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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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영(고문)

경기침체와 인플레 등 경제생활의 변화 요인들이 발생하면서 국제적인 노동력 이주현상이 눈에 띄게 나타나고 있다. 지난 6일자 본지에 보도된 동구 이민자들의 본국 귀환 추세가 대표적인 예이다.

지난 2004년 동유럽 국가들이 EC 회원국이 되면서 이들 나라에서 많은 노동자들이 서유럽 국가로 이주했는데 이제는 이들이 다시 자기 나라로 돌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이 서유럽 국가에 온 것이 경제적 이유 때문이었듯이 돌아가는 것도 경제적 이유 때문인 것이다.


서구는 이미 공업화가 완성된 나라들인데 최근들어 경기가 침체하면서 일자리가 줄어들고 있다. 반면에 폴랜드와 발틱 3국, 루마니아 등 동구 국가들은 낙후한 상태에서 공업화에 박차를 가해 고도성장을 하고 있는 중이다. 그래서 임금도 가파르게 상승하여 일부 전문직종은 오히려 서구보다 임금수준이 높다고 한다. 그러니 서구에 이주했던 동구 노동자들이 보따리를 싸지 않을 수 없다. 이 바람에 영국, 아일랜드, 스웨덴 등 서구 국가들은 인력난을 걱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외래 노동자들이 아니라 본국 국민들의 해외 이민이 늘어나고 있는 것이 최근의 추세이다. 외국으로 이주하는 이유를 보면 어린이는 조기유학, 청년은 취업, 중장년은 사업, 노년은 편안한 노후생활을 위해서이다. 주로 영어권 국가를 선호하지만 최근에는 동남아 등 생활비가 저렴한 곳을 택하는 사람들이 증가하고 있다. 한국 국내에서 행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경제와 교육 등 이유로 해외 이주를 고려하고 있다는 응답자가 지난 2004년 36%, 2007년 37% 정도에서 올해는 40%로 급증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현상이 이민의 나라인 미국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미국은
지금까지 세계의 모든 나라에서 이민이 모여드는 ‘기회의 땅’이었다. 미국에 온 이민자들은 이 미국에서 경제적인 성공, 즉 ‘아메리칸 드림’을 성취했다. 그러나 최근들어 미국의 경제가 쇠퇴하면서 이민자들의 역이민 현상이 부쩍 늘었다. 대표적 사례로 브라질의 경우 역이민자의 수가 신규 이민자보다 훨씬 많아졌다고 한다. 앞으로 중국이나 인도의 경제가 발전한다면 이들 나라에서 오는 이민도 역이민으로 바뀔 수 있을 것이다.

이민자들의 역이민보다도 더 큰 문제는 미국을 떠나는 토박이 미국인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기업인들은 세금과 인건비가 싼 곳을 찾아서, 숙련지식 노동자들은 더 좋은 일자리를 찾아서, 은퇴자들은 세금이 낮고 생활비가 싼 곳을 찾아서 미국을 떠나고 있다. 이들은 주로 캐나다, 멕시코, 파나마 등 미국에서 가까운 지역을 선호하지만 이주 범위가 점점 확대되고 있다. 현재 해외에서 살고 있는 미국인은 약 700만으로 추산되는데 여론조사기관인 조그비가 지난 2005년부터 2007년까지 조사한 바에 따르면 미국인 770만 가구 이상이 해외 이주를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 매년 300만 이상의 미국인들이 해외로 떠나고 있다고 주장하는
전문가들도 있다. 더우기 해외 이주 희망자 가운데는 25세부터 34세 사이의 젊은층이 압도적이란 사실이 충격적이다.

왜 미국인들이 기회의 땅인 미국을 떠나고 있을까. 경제가 좋지 않기 때문이다. 지난 19세기를 전후하여 고속성장을 한 미국 경제는 이제 성장이 매우 둔화된 데 비해 신흥공업국들은 눈부시게 빠른 속도로 경제가 성장하고 있다. 그리하여 세계가 경제 평준화를 향해 질주하고 있는 상황에서 미국은 상대적으로 침체감에 빠지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얼마 전 미국 이민자들을 상대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이민자들은 아직도 미국에서 아메리칸 드림을 성취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는 것이다. 이민 초기에 있는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당연하다. 자기의 모국에서 생계조차 어려웠던 사람도 미국에서는 최저임금 이상의 임금을 받을 수 있으니 생활비를 아껴 쓰고 얼마쯤은 저축이나 모국 송금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과거처럼 큰 돈을 번다는 것은 어림없게 되었다.

불과 10년 전, 20년 전만해도 소매상을 하여 수백만 달러를 벌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 못하다. 렌트와 인건비 등 각종 비용이 뛰어 수익이 많지 않다. 미국에서 봉급생활을 하는 서민층은 빠듯한 급료로 생활에 허덕이고 있다.반면에 신흥공업국에서는 빠른 경제성장으로 임금이 상승하고 있고 한국 경제개발 시대에 말죽거리의 땅값이 올라가듯이 재산이 불어나고 있다. 불과 몇 년 사이에 중국에서는 카네기 같은 갑부가, 또 러시아에서는 라커펠러 같은 갑부가 생겨났다. 미국에서 돈을 물쓰듯 하는 사람들은 미국인들이 아니라 신흥공업국과 아랍 산유국의 졸부들이다. 아메리칸 드림이란 말이 무색해진 것이다.

이제 아메리칸 드림은 그저 드림일 뿐인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아메리칸 드림을 안고 미국에 온 한인들이 이 드림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서는 과거보다 몇 배, 아니 몇 십배의 인내와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우리에게는 아메리칸 드림을 성취하는 길밖에 다른 길이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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