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덤으로 사는 인생

2008-08-05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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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철(목사/수필가)

“벌서 여러 차례 혈액검사를 했는데 여전히 포타시움(Potassium) 치수가 높습니다. 아무래도 신장(Kidney)을 검사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하여 나는 주치의(Dr. Han)가 지시하는대로 신장 전문의를 찾아가서 검진을 받았으나 별 이상이 없다고 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상태에서 세월만 보내고 있는데 하루는 주치의에게서 연락이 왔다.

자기와 친한 심장전문의(Dr. Lee)와 의논했으니 내일 당장 그리로 가서 검진을 받으라는 전갈이 왔다.별로 맘에 내키지 않았지만 시키는대로 심장전문의를 찾아갔더니 스트레스 테스트를 하더니만 내일 아침 일찍 병원에서 만나 혈맥을 통한 심장 검사(Angiolography)를 해봐야 겠다고 말한다. 지금껏 심장 하나 만큼은 자신감을 가지고 살아왔는데 느닷없이 웬 심장 타령이란 말인가?


그러나 심장 검사 결과는 뜻밖에도 심장 동맥이 95% 꽉 막혀 어느 순간 갑자기 심장마비가 올 가능성이 매우 높으니 당장 심장수술(By-pass)을 받아야 한단다. 일방적으로 서둘러 그대로 침상에 누운 채 앰블런스에 실려 심장 전문병원으로 이송되어 간 후 이틀만에 마취에서 깨어나니 나는 중환자실(ICU)에 누워 있었고 온통 가슴이 깨지는 것처럼 아팠다. 생가슴을 10인치 가량 쪼갰다가 붙여 놓았으니 숨 쉬기조차 어려운 상태였다. 어쩌다가 기침이라도 할라치면 가슴이 뻐개지는 것 같았다.

한 치 앞도 예측할 수 없는 것이 인생이라 했던가? 며칠 전에 나라는 인간은 일단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것이다. 만일 심장질환을 미리 발견하지 못했더라면 어느 한 순간에(밤에 자다가라도) 심장마비를 일으켜 속수무책으로 생을 마감하지 않았겠는가! 고희를 넘기고 몇 년을 더 살았으니 이쯤에서 내 인생이 끝난다 해도 여한이야 없겠지만 돌이켜 생각해 본 즉 파란만장했던 나의 일생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이제부터 나의 인생은 ‘덤으로 사는 인생’이라 생각되어 진다. 인간의 수명이란 한계가 있는 법인데 장수에 대한 욕망이란 한이 없는 것인가. 이제부터 인생을 마감하는 마음의 자세로 살아가야 겠다는 생각으로 마음이 모아진다. 허면 ‘덤으로 사는 인생’, 과연 어떤 모양으로 살아가야 할까?

오래 전(약 40여년 전쯤)에 한국에서 히트했던 ‘수잔나’라는 영화가 문득 떠오른다. 영화 속 주인공 ‘수잔나’는 여고 2학년생으로서 팔등신 미모에 전교 수석을 맡아놓고 하는 수재에다 가정은 부유하여 아버지가 그 여학교의 주인이자 이사장이니 어느 누구도 수잔나를 건드릴 수가 없는 처지였다. 심지어는 학교생활까지도 자기 멋대로였으며 자기가 마음먹은 것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기 것으로 만들고야 마는 욕심꾸러기여서 자기 언니의 애인까지도 유혹하여 빼앗고 만다.

그런데 가끔 갑작스럽게 두통이 오곤 하다가 급기야는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았는데 뇌암이란 진단 결과가 나왔다. 놀란 부모님은 이 사실을 본인에게 숨기고 안심을 시켰으나 얼마 안가서 사실을 알게 된 수잔나는 기가 막혔다. 자기 방에 들어가 문을 걸어 잠그고는 식음을 전폐한 채 사나흘 동안 몸부림치며 통곡을 하고 난 수잔나는 몸과 마음을 가다듬고 나서 이제 3개월밖에 남지 아니한 시한부 인생을 살아가기에 너무나도 숨이 찼던 것이다.우선 빼앗았던 언니의 애인을 언니에게 되돌려 주었고, 학교에 가서는 그간에 말 안 듣고 괴롭혔던 교사들을 일일히 찾아다니며 사죄를 했다. 오만방자하여 업신여기며 괴롭혔던 친구들에게도 눈물로 잘못을 호소했다. 그리고 나서 수잔나는 마지막으로 교회에 가서 지금껏 월등하게
좋은 조건 하에서 살아온 것에 대한 감사 기도를 드렸다. 그리고 그 좋은 조건들을 남들을 괴롭히는데 사용했음을 참회하고 남은 시간이나마 유종의 미를 거두게 해 달라고 간구했다.

‘덤으로 사는 인생!’ <생자 필멸>이라 했으니 누구나 다 언젠가는 인생을 마감해야 함에는 예외가 없다고 본다. 그러나 주어진 생을 다 누리지 못하고 갑자기 생을 끝내야 하는 경우(자의이건 타의이건), 기적적으로 생명을 연장 받았다면 그야말로 <덤으로 사는 인생>이 아니겠는가! 그런 사람이 이 세상에는 무수히 많으리라 생각된다. 만일 덤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다 하나같이 수잔나가 회개한 것처럼 살아간다면 이 세상은 훨씬 더 살기 좋은 세상이 되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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