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칼럼/ 오늘 하루도 돌아간다

2008-07-26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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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욱(논설위원)

하루하루가 간다. 아니 하루하루가 온다. 그러나 하루가 간다고도 온다고도 할 수 없는 것이 세월 아니던가. 시간과 공간은 그대로인데 인생만이 가고 오면서 세월이 간다고 혹은 온다고 말하는 것은 아닐까. 수억 수천수만 억 년 전의 시간이, 공간이 지금도 그대로 유유히 흐르고 있지를 않은가. 아니 흐르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멈추어 있는 것 같질 않은가. 사람이란 무엇인가. 생명은 어디서, 언제부터 시작되는가. 왜 태어나는가. 왜 사는가. 왜 죽는가.

삶과 죽음이란 무엇이 다른가. 태어나기 전에는 무엇이 있었던가. 죽은 다음에는 무엇이 있는가. 생명체란 왜 귀중한가. 생명체란 다 귀중할 텐데 인간은 다른 동물보다 왜 더 귀중한가. 다른 동물의 죽음과 인간의 죽음과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죽음이란 궁극적으로 무엇인가. 1년 전 60 회갑을 넘기지 못하고 생을 마감한 친구 시인의 기일이 며칠 남지 않았다. 또 70 고희를 얼마 안 남기고 세상을 떠난 선배 시인의 기일도 점점 다가온다. 그들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그들을 생각하는 살아있는 사람들의 기억 속과 마음 안에 있지 않을까. 그러나 그들의 몸짓과 밝은 눈망울은 이 세상 어디에서도 만나볼 수 없으니 진정 그들은 없는 걸까.


멈추어 있는 듯 그대로인, 세월 속에 숨어 있는 것이 그들의 죽음인가. 죽음은 현실이다. 죽는 순간 사람의 틀을 타고난 생명체의 기(氣)가 이 세상으로부터 사라짐이다. 어디에도 죽은 사람의 몸짓은 재생되지 않는다. 하지만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죽은 사람들은 살아있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 살아남아 그 어떤 의미를 계속 던져주고 있으니 그렇다.

구수한 경상도 사투리에 콧수염을 기른 중년의 사나이. 수 세월 병고를 앓으면서도 시를 그토록 사랑했던 친구의 삶과 죽음은 아직도 내 머리와 마음속에 그대로 살아 있다. 그는 죽지 않고 살아있어 그를 기억하는 모든 사람들과 함께 살아간다고도 할 수 있다. 죽음 저편에 있지만 살아있는 친구, 그와의 대화를 한 번 시도해 본다.
“남구야 너/ 어디 있냐/ 너는 대답이 없구나/ 그래 너가 간 곳은/ 어떠냐/ 살기 좋으냐/ 살기 싫으냐/ 나도 언젠가는/ 너를 따라/ 갈테니/ 그곳에 좋은/ 방 하나 마련해 놓고/ 지상에서 다 하지/ 못했던 사연들/ 서로 나누어/ 보자꾸나/ 너 가는 길도/ 제대로 배웅하지/ 못한 나다/ 하늘에서나마/ 용서하거라.”

여행사를 꾸려 동서양 온 세계를 드나들며 풍진 삶을 살았던 선배 시인은 ‘가시’란 제목으로 시를 많이 쓰곤 했다. 가시를 품어서인지, 언제나 자상하지만 어둠을 그리곤 했던 그의 얼굴을 기억하는 모든 사람들에겐 아직도 그의 죽음은 현실로 다가오지를 않을 것 같다. 선배 시인을 기억하며 한 편의 시를 써 본다. “가시를 그렇게/ 좋아하던 그가/ 떠난 지도 어언 1년이 되어간다/ 왜 그렇게 가시를 좋아했을까/ 가슴에 서린 가시/ 가슴으로 뽑아내지도/ 못하고 그 가시에/ 찔려 그는 그렇게/ 가 버렸던가/ 내 나이 30대에 만난/ 그의 나이는 40대였는데/ 내 나이 50 말에/ 그는 60 말의 생애를/ 보내고 가시와 함께/ 세상을 등지고 말았네/ 하늘에 있을까/ 땅 속에 있을까/ 가시를 품어 안고/ 오늘도 세상을 향해/ 슬픈 얼굴을 하고 있을/ 그를 생각하니/ 내 마음 속에 가시 하나/ 나를 찌르고 있네.”

또 한 사람의 죽음 소식을 접한다.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프리마돈나 홍OO씨의 남편이 54세의 나이로 며칠 전 생을 마감했다는 소식이다. 그와는 몇 번의 만남 속에서 흘러가는 세월을 함께 노래하며 향수를 달랜 적이 있다. 그는 일찍이 미국에 들어왔지만 한국말을 유창하게 잘했다. 변호사였던 그. 지역사회와 후배들과 한인사회를 위해 한창 일 할 나이인데. 인생무상인가. 태어나는 것은 순서가 있어도 가는 순서는 없다고 했던가. 산 사람은 이곳에, 죽은 사람은 저 곳에 있다. 그러나 삶과 죽음이란 둘이 아니라 연장선상에 있는 것은 아닐까. 삶 전과 죽음 후도 연장선상으로 이어질 수 있지 않을까. 삶 전이란 부모의 생이 될 수 있고, 부모의 삶 전이란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생이 될 수 있다.

죽음 후의 삶, 즉 영생이란 자식의 생이 될 수 있고 그 후의 삶이란 손자와 손녀의 생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자식이 없는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가. 그들의 삶과 죽음은 지인들의 기억 속에 남아 영원히 살아가게 될 것이다. 해는 해대로, 달은 달대로인데 사람들이 돌고 돈다. 세월 속에 인간의 생노병사(生老病死)는 계속되고 오늘 하루도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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