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한인들에게 낯선 형량협상 제도

2008-07-22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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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중돈(법정통역)

이곳의 형사사건 재판에서는 사건의 거의 전부가 검찰과 변호인 사이에 소위 ‘형량 협상(Plea Bargain)’이라는 절차를 통해서 끝나게 되는데 이런 절차를 알지 못하는 한인들이 이런 경우에 꼭 따지고 넘어가야 할 중요한 요점을 인식하지 못한 채 엉거주춤 사건을 끝내버리는 경우를 많이 보아 온다.우리 한인들은 일반적으로 형사사건의 재판이라면 유죄를 주장하는 검찰측과 피고인을 대표하는 변호인측이 각각 증거와 증인을 불러서 각자의 주장을 편 다음에 판사가 최종적으로 판결하는 것으로 알고 있고 이것이 이곳에서도 형사사건 재판의 근본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곳의 형사법원에서는 한국인들에게는 생소한 Plea Bargain(적절한 번역이 어려워 편의상 ‘형량 협상’이라 부르기로 한다)이라는 제도가 있어서 형사사건의 대부분이 이 제도를 통해서 끝나게 된다. 이 제도는 검찰이 경찰의 입건 서류에 기재된 사건의 기초와 간단한 초동수사를 통해 알게된 혐의사실을 근거로 이런 정식 재판절차에 들어가지 않고 피고인에게 받아들일만한 형량을 제시하고 그에 상당하는 범법사실의 유죄를 시인하면 판사의 승인을 받아 재판을 끝내는 아주 편리하고 기능적인 제도이다. 검사가 이런 제시를 할 적에 의례 입건될 때의 혐의사실을 낮추어 주는 것이 일반적이고 또 변호인이 더 유리한 협상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 때문에 피고인들에게도 아주 유용한 제도이다.


그런데 이런 협상과정에서 많은 한인들이 어떤 처벌을 제시받느냐에만 관심이 있지 유죄를 시인해야 하는 범법 사항이 형사범죄의 전과로 기록되는 형사범죄냐, 아니면 아무런 범죄기록이 되지 않는 행정규칙 위반(Violation) 혐의로 유죄를 시인하고 끝이 나는지의 가장 중대한 문제
를 알려고도 하지 않는 사람이 많다.최근에 불법 마사지 혐의로 체포된 한 여인이 체포된 이튿날 법원에서 입건재판을 받는 날, 이미 이민국이 추방절차에 들어가겠다는 신병 인수 통지가 붙어있어서 깜짝 놀란 일이 있었다. 이 여인은 지문조회 결과 이미 두 번에 걸친 매춘죄를 시인한 전과 기록이 있었다. 이래서 경찰이 누범(累犯)자 취급을 하게 되었고 이 데이터를 입수한 이민국이 이 사람의 불법체류 신분을 알고 이런 통지를 보낸 것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여인은 매춘죄의 유죄 판결을 받은 일은 결코 없으며 두번 다 기각 판결을 받고 끝난 것으로 알고 있었다. 짐작컨대 이 사건의 형량협상 과정에서 검찰이 혐의가 된 매춘죄에 유죄 시인을 하면 조건부 종결(Conditional Discharge) 처분, 즉 앞으로 일년 이내에 다시 범죄를 저지르지 않으면 처벌하지 않고 사건을 끝낸다는 조건을 제시했고 여인은 당장의 처벌이 없다는 것에만 관심을 가지고 이를 받아들이고 사건을 마무리한 것으로 보인다. 말하자면 형사범죄이고 더구나 추방대상이 되는 매춘죄를 시인한다는 중요한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이를 받아들인 것이다.
이 여인은 중국에서 온 조선족 동포인데 그곳의 상식으로 사건이 처벌 없이 끝난다는 것은 곧 무혐의로 끝난다고 믿고 있었고, 변호사에게도 자세한 내용을 알아보려고도 하지 않았던 것 같았다.

그런가 하면 이 사람과는 반대로 검찰이 아주 좋은 조건을 제시하는데도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무죄만을 고집하는 선무당식 사람도 있다. 50대의 한인 남자가 싸구려 트럭을 가지고 오는 중에 경찰의 검문에서 차에 붙어있는 임시등록 서류가 위조라는 것이 판명되어 공문서 위조 및 행사 혐의라는 중범 혐의로 체포되었다. 그렇지만 입건 재판에서 심각한 사건이 아님을 알게된 검사가 행정규칙 위반 급(及)에 해당하는 문란혐의(Disorderly Conduct)를 시인하면 150달러의 벌금형으로 해주겠다고 의외의 후한 제시를 했는데 자기는 위조 사실을 몰랐으니 정식재판절차에 들어가겠다고 고집했다. 이를 받아들였다면 벌금 150달러만 손해볼 뿐 아무 범죄기록이 되지 않고 끝날 일이었는데 이제 변호사를 선임하는 것만으로도 그 혐의가 중범으로 되어 있으니 엄청난 비용이 들게 될 것이고 중범 혐의로 재판을 받아야 되는 선무당 행위를 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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