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존재와 시간

2008-07-21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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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철우(홈아트 갤러리)

새벽 4시다. 잠시 자리를 비웠다.
피로가 겹쳐 화장실에서 목 뒤를 차가운 물수건으로 적시며 가벼운 어깨운동을 하니 기분이 조금 좋아졌다.다시 자리로 돌아오니 김박사는 청진기를 목에 걸고 어머니와 이야기를 나누다 나와 눈이 마주쳤다.

“김선생님, 와 계셨군요. 밤 늦게까지 고생이 많으십니다”
내가 그에게 해야 할 인사말을 그가 먼저 나에게 한다. 다른 병실에 어머니보다 더 급한 환자가 있어 오늘은 좀 늦었다며 미안해 하는 그에게 “감사합니다” 이 감사하다는 말밖에 다른 구구한 말이 필요 없을 것 같았다.
우리 가족은 어머니의 장례식을 마치고 담당의사에게 어떤 답례를 하면 좋은가 의논을 할 때 동생이 봉투를 나에게 내밀었다. 김박사가 보낸 조의금이었다.


또 한 발 늦었다. 왜 이렇게 어리석은 행동만 하고 살아가고 있는 것인가. 김박사와 같이 좀 더 순수할 수는 없을까.나이 92세가 되도록 20여년간 어머니 건강을 보살펴 준 김박사는 우리 어머니 뿐만이 아니라 퀸즈에 있는 여러 병원은 물론 널싱홈(Nursing Home) 거동이 불편한 노인들을 위해 아파트까지 방문 치료해 주는 분이다. 그는 의술을 터득하기 전에 성품부터 터득하였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어머니의 임종 앞에서 느낀 것도 아니다. 죽음이란 길목에서 우리는 어떤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사람은 누구나 다 이 길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있다.내가 지금 존재하고 있다는 것, 어떤 목적이나 뜻이 있어서 태어난 것이 아니다. 만약 내가 태어나길 바라는 어떤 목적이 있었다면 그것은 부모나 아니면 그 주위사람들이었지 나의 뜻은 아니었다. 그렇더라도 나를 둘러싸고 있는 존재라는 세계에서 항상 그들과 어떤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그 관심의 하나가 불안(不安)이다.

독일의 철학자 하이대거(Heidgger Martin 1899~1976)가 존재와 시간에서 지적했듯이 인간적 삶의 실상은 이러한 ‘존재적 불안’인 것이다. 왜냐하면 그 속에 죽음이란 것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아무리 인간이 양심적 결단을 내리고 스스로의 존재를 영원한 것으로 만들고 싶으나 그것은 헛
된 노력이다. 죽음이 앞으로 다가올 때는 모든 존재의 노력은 허무해지고 만다.우리 주변에서 열심히 뛰어다니고 있는 사람들에게 무엇 때문에 그렇게 사느냐고 물으면 돈과 경제, 정치와 권력, 기계와 기술, 이런 것을 얻기 위해서라고 대답한다.

그러나 그것들이 소중하기는 해도 삶의 수단으로서의 가치일 뿐, 목적으로서의 가치는 될 수 없다. 오늘의 현실은 재산을 얼마나 많이 갖고 있는가, 수입이 어느 정도인가에 따라 인간의 가치를 평가받고 있다.기계의 기술 또한 마찬가지로 현대사회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오늘의 과학도 기계와 기술 개발에 그 목적을 두기 때문에 과학이 상품적 가치의 시녀 노릇을 하고 불행한 사회로 전락되고 말았다.

지금,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과제는 삶의 가치관부터 바로잡아야 할 것이다. 삶이란 수단가치보다 삶의 목적가치를 바로잡지 못하면 오늘의 위기와 불행이 치유될 수 없다.인간적 삶이란 성선설(性先說)이 삶의 핵심이 되어야 한다. 창조적인 삶, 예술가가 혼신을 다하여 새로운 작품을 완성시켰을 때의 기쁨, 과학자가 새로운 원리를 발견했을 때의 기쁨, 학자가
새로운 지식을 터득하였을 때의 기쁨, 성실과 사랑으로 삶의 가치를 가르쳐주는 종교, 이런 것들이 인간적 삶의 목적이다.

그리고 시간이란 무한한 존재이지만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유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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