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이승만박사 서거 43주기를 맞아

2008-07-18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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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모(이승만박사 뉴욕기념사업회 회장/UMC 원로목사)

1960년 6월 7일 정일형 의원의 제안으로 이승만 박사와 이기붕씨에 대한 ‘특정재산 조사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이화장을 샅샅히 뒤졌고 국세청이 해외도피와 부정축재 등에 관한 소문을 입증할만한 증거를 하나도 찾아내지 못했다.

이박사의 평생지기이자 조언자로서 그를 가까이서 지켜본 로봇 올리버는 훗날 이렇게 회고했다. “이박사는 부패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이는 터무니없는 소리다. 그는 평생을 가난하게 살았다. 하와이 망명할 때도 돈 한푼 가진 게 없이 왔고 동포들의 성금으로 살아야 했다” 대통령 재직시에도 마찬가지였다. 국고의 달러 지출을 철저히 챙긴 것은 널리 알려져 있다.


동포들의 후원금으로 독립운동을 했기 때문에 한푼이라도 잘못 사용해서는 안된다는 강박감이 늘 있었다. 스위스 국제대회에 참가했던 이승만박사가 호텔 식당에서 우연히 프란체스카 여사와 처음으로 한 테이블에서 식사했다. 그 때에 어머니 하고 같이 여행중이던 프란체스카 여사가 충격적인 인상은 국제대회 한국 대표라는 이승만 박사가 주문한 식사메뉴가 고작 감자 몇 개 하고 삶은 콩깍지였다. 두 모녀의 디너 메뉴와 각국 대표들에 비하면 너무나 초라했다. 1930년대 이야기다.그렇게 절약하며 독립운동을 한 이박사는 평생을 검소 절약의 생활을 했다.

수천억원의 비자금을 숨겨뒀다 발각된 전직 대통령, 비자금 축재 등으로 국민을 실망시켰던 부패한 대통령, 정치판에서 아직도 일확천금을 꿈꾸는 얼빠진 정치인들과는 분명 달랐다. 이박사는 누가 뭐래도 청렴한 대통령이었다.(‘가난한 대통령’ ○○일보 현대사 전문기자). 수백억원을 들여 대통령 마을을 짓고 사는 전직 대통령에 비교해 볼 때 이박사는 가난한 대통령이었다. 이화장을 가 보면 안다. 독립운동 시절부터 썼던 끝이 닳아 용도폐기 상태인 면도 솔을 보면 알 수 있다. 그의 애국심과 청빈함을 찬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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