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민족사에서 본 망향의 의미

2008-07-14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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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순영(한미역사문제연구위원)

고향의 그리움을 나타낸 어느 분의 글 중에 어머니의 따뜻한 품속까지는 아니더라도 고향 어귀에 다달았을 때 느끼는 가슴 저릿한 떨림은 고향을 찾는 사람 누구나의 설레임이라고 했다.사람에겐 누구 할 것 없이 고향은 있게 마련이다. 그런 고향을 남달리 못잊어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태어난 곳이 고향이라고 담담하게 잊으려고 하는 사람도 있다.
그렇지만 한국사람들의 가슴 속에 스며있는 고향에 대한 향수는 세계 어느 나라 사람에게도 찾아볼 수 없는 아픔과 애환이 서려있는 것이 고향을 그리는 마음이다.

한국인의 고향에 대한 남다른 애착은 조상숭배 사상과 배 고팠던 시절 이웃이란 공동체를 형성하며 서로 품앗을 나누고 고락을 함께 하며 살았던 혈연, 지연이 원인이었지 않았나 싶으며 민족 수난사에서도 망향의 아픔을 찾아볼 수 있을 것 같다.민족 수난사에서 불리워진 실향민이나 유민, 피난민이란 말은 12세기 고려조 무신정권에서부터 조선조와 일제 강점기, 8.15 해방과 6.25전쟁으로 이어지는 말인 것 같다.


고려조와 조선조 500년의 역사에는 관헌이나 사대부들은 많은 토지를 소유할 수 있었으며 농민에겐 제한된 토지만을 소유토록 했다. 군역과 부역에 시달리며 목숨을 연명해야만 했던 농민과 천민들에겐 고향 자체가 괴로움의 터전이 되고 말았다.1910년 일본이 우리나라를 합병하고 총독부 무단정치가 본격화되면서 조선인의 토지를 반강제로 수탈했었다.

토지를 빼앗긴 조선인은 가족의 호구지책을 위해 고향과 조국을 떠나 북간도나 연해주로 이주, 농토를 개간하고 망국의 한을 달래가며 살아야만 했던 것이 유민, 실향민으로 불리워진 시초였다.나라 잃은 백성으로 일본이 일으킨 전쟁에 시달리며 살아온 우리 민족에게 해방이란 감격을 안겨 주었지만 통일 정부를 수립할만한 역량을 갖추지 못한 국민과 민족 지도자들은 좌,우 대립의 싸움질로 자주 통일 정부를 세우지 못했다.

그런 중에 소련은 그들이 점령했던 북한지역에 김일성 공산정권을 수립시켜 놓고 남한에 대한 침략전쟁을 일으켜 200만명의 사상자를 발생케 한 민족상잔의 비극을 불러오게 만들었다. 국토 분단과 6.25 전란을 피해 남하한 1,000만의 피난민과 그 후손들은 지금도 헤어진 부모 형제와 고향 산하를 그리워하며 망향의 설움을 달래가며 살고 있다.10살 어린 소녀였던 아내는 고향땅 개성을 떠나면서 겪었던 단장(斷腸)의 기억들을 들려줄 때
마다 생전 가보지도 못한 처가 마을 풍경이 수채화에 그려진 그림처럼 눈앞에 펼쳐진다.

우리 민족에겐 고향을 그리워하는 향수에 젖은 노래가락이 유난히도 많이 불리워지고 있다.사람마다 애틋한 사연을 간직한 가요 중에는 고향산하를 못잊어 하는 노래와 부모 형제 친구를 그리는 노래가 많이 불리워지고 있다. 그 중에서도 고향을 그리워하며 부른 가요 중에는 설운도가 부른 ‘실향민의 한’, 백난아의 ‘찔레꽃’, 한정무의 ‘꿈에 본 내 고향’, 정지용의 ‘향수’, 그밖에도 헤아릴 수 없는 고향을 그리는 노래들이 이민자나 실향민의 마음을 달래주고 있다.

실향민으로, 실향민의 후손으로 살아가며 북녘땅 고향 산하와 부모형제를 그리며 살아가는 이북 5도민들의 한맺힌 설움을 달래려는 글들은 신문이나 잡지속에 애절하게 쓰여져 있다.그들 가운데서도 장도영 장군으로부터 받은 그의 한맺힌 굴절의 삶을 역사의 심판 속에 묻어두려고 쓴 자서전 ‘망향’을 읽으면서 우리 민족에겐 망향의 의미가 어떻게 전해지고 있는지를 생각해 봐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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