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조선족을 이해하자

2008-07-09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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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태진(변호사)

중국 길림성 연변 조선족 자치구에 있는 연길시 공항은 한국으로 가는 항공기를 타려는 조선족과 그들을 전송하기 위한 친지들로 연일 북새통을 이루고 있다.

정든 고향을 떠나 돈을 벌기 위해 또는 더 잘 살기위해 한국으로 떠나고 있다. 현재 30만명 이상의 조선족이 한국에 있다고 한다.
2007년 2월 중국 소수민족 인구 통계에 의하면 중국 내에 조선족은 192만597명이 있다고 한다. 이들은 대부분 북한과 접경해 있는 동북 3성인 길림성, 흑룡강성, 요년성에 산재해 있으나 그 중 42% 가량이 길림성 연변 조선족 자치구에 살고 있다.


연변 자치구 내에는 조선족 외에 한족, 만주족, 회족 등 24개 민족이 살고 있으며 전체 인구는 약 217만5,000명이며 조선족은 81만6,000명으로 약 37%를 차지하고 있다. 조선족이 가장 많이 살고있는 곳이 연변자치구 내의 가장 큰 도시인 연길시이다.2007년 연길시 통계국이 발표한 바에 의하면 연길시 인구는 42만9,100명이며 조선족은 57%인 24만7,700명으로 집계되었다.

백두산(중국은 장백산이라 칭함)을 나와 함께 갔던 조선족 리금호씨에 의하면 연길시에만도 한국으로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10만명 이상이 떠났으며 지금도 가려고 하는 조선족들이 줄을 서있다고 한다. 그래서 조선족의 최대 거점인 연길이 한족으로 점점 채워지고 있다고 그는 걱정하고 있다.
한민족이 연변으로 이주하여 정착하기 시작한 시점을 대체로 1860년대로 이해한다. 한반도에 기근이 들어 생활이 어렵게 되면서 두만강과 압록강 부근에 살던 주민들이 생활이 어렵게 되자 두만강과 압록강 부근에 살던 주민들이 강을 건너 이곳에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극히 소수에 불과했다.
이후 이주 과정은 크게 3단계로 볼 수 있는데 1900년 초까지 경작을 위한 생계형 이주, 을사보호 체결을 계기로 일제 침략이 노골화된 시점부터 1920년대까지 독립운동 참가형 이주, 1930년 이후 일본 총독부가 군량미 확보를 위해 추진한 강요에 의한 비자발적 농업 이주 등이다.

1900년대 초 생계형 이주는 대체로 두만강과 압록강 주변 사람으로 독립운동 참가형 이주는 전국에서, 1930년 이후 비자발적 농업 이주는 주로 남한 사람들이 많았으며 연변지역 보다 요년성과 흑룡강성에 넓게 분포되었다. 이들을 디아스포라라 부른다.미국에도 수많은 조선족들이 각처에 산재해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뉴욕 일원에도 수 만명이 있다고 한다.
뉴욕에 사는 많은 조선족들은 그들이 한국 교민들의 업체에서 일을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신분의 불확실, 언어의 장애 등 여러가지 이유로 인권이 무시당한다든가 착취당하는 조선족들도 있다고 한다. 이것은 우리 주위 뿐만이 아니다. 한국에서도 마찬가지로 차별을 받고 있는 예가 많다고 한다.
반대로 이들을 위해 헌신적으로 봉사하는 사람들과 단체들이 한국이나 미국에도 있다. 플러싱에 소재한 비영리단체인 조선족 선교회는 조선족에게 미국 생활에 적응되도록 각종 상담을 해주며 영어와 컴퓨터를 무료로 가르치는 봉사단체이다. 이 단체는 거의 10여년 가까이 조선족들을 돕고 있다.

조선족들은 그들의 선조들의 선택 때문에 디아스포라가 되어버렸다. 역사의 수레바퀴 속에서 수많은 고난을 당하여 왔다. 우리가 경제적인 도움을 줄 수 없다 하더라도 우리가 이들에게 인격적 대우를 해야함은 물론이며 따뜻하게 사랑을 베풀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참고:인구 숫자는 곽승지 저 ‘동북아시대의 연변과 조선족’에서 발췌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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