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툭툭 떨어진 장미꽃송이

2008-07-04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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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월정(시인)

“아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 날을…” 이 노래가 우리의 뇌리에서, 그리고 입술에서 점점 잊혀져가는 아쉬움 만큼 6.25 58주년의 감회는 가슴에 구멍이 난 듯 허전하고 또 쓰렸다.

습기를 머금은 공기는 피부에 감기고,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인색하기만 했다. 그래도 주인의식을 되살리며 정복을 갖춘 7,80세 노인이 된 한국전 참전용사들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바라보았다.워싱턴에 있는 한국전참전 기념비의 규모와 느꼈던 충격적인 감동과 감격에 비할 수는 없지만
자유의 여신상이 바라보이는 로우 맨하탄 배터리 팍에 오롯이 세워진 기념비를 바라볼 때, 잔잔한 감동이 목에서부터 가슴에 따뜻한 줄을 그으며 흘러내렸다.


몇 안되는 터키 한국전참전용사를 위해 워싱턴에서 날아온 터키 대사의 열정적인 스피치가 참으로 인상적이었다.사회를 맡은 Commander Joseph Calabria, 서 있기조차 힘겨워 보이는 노장은 한국전 참전을 결정하며 트루만대통령이 남겼던 명언 “Freedom is not for free!” 힘을 주어 인삿말을 끝맺고 의자에 주저앉고, 나는 미군 사망자 5만4,246명(부상자, 실종자를 합하면 13만명) 숫자를 떠올리며 가슴에 두 손을 모았다.
헌화 순서에서 오늘의 행사를 주관한 스태튼아일랜드 한국전참전용사 지부에서 성조기를 수놓은 커다란 화환을 기념비 앞에 드리고 이어 한국 뉴욕총영사(관) 차례가 호명되었다.

시간이 지체되기에 무슨 영문인지 모두들 궁금할 즈음에 총영사와 부영사(?) 두 분이 받쳐들고 걸어나오는 화환을 보는 순간 “아니 이럴 수가!” 쟁반 사이즈의 화환의 크기는 그렇다 치더라도 툭툭 떨어지는 꽃송이를 집어서 꽂으며 떨어질까 쩔쩔매는 두 어른(?)의 뒷모습을 바라보기가 너무나 민망스러워 안절부절 못하는 내 대신, 어느 참전용사 옆에 앉으신 할머니 입에서 “Shame…” 하는 말이 흘러나오고 말았다.

포장을 벗긴 대한민국의 실상, 추락하는 대한민국의 위상을 대변하는 퍼포먼스를 보는 것 같은 착각은 나만의 과민반응이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한편 참으로 감사한 것은 행사가 끝난 후 스태튼아일랜드 뉴욕만백성교회(김성찬 목사)에서 그 가족 등 80여명을 초청하여 넉넉하고 푸짐하게 갖가지 맛있는 음식을 대접할 수 있었던 것이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모른다.
더위와 목마름에 지쳐보이던 노인들이 맛있게 음식을 들며 환담하는 그들의 얼굴 표정을 살피고 나서야 울렁거리던 가슴을 남몰래 쓸어내릴 수 있었다.

내 앞에 74세가 되는 할아버지, 16세에 이름도 들어본 적 없는 코리아를 위해 목숨을 내놓고 싸웠던 그는 멤버 중에서 제일 어리다고 했다. 그 옆에서 접시 수북하게 두번째 음식을 담아온 할아버지는 왼손 검지 두 마디가 잘려 있었고(궁금해도 그 손가락 전쟁 때 잃은 것이냐고 물을
수가 없었다) 내 옆의 80세인 할아버지는 앞으로 몇 번이나 더 이 행사에 참석할 수 있을까? 착잡한 생각에 그의 옆얼굴을 몰래 몰래 보고 또 새겨보았다.

해마다 한 분 두 분 떠나고 행사는 점점 쓸쓸해질 수밖에 없는데… 머지않아 한국전참전용사는 한 분도 남아있지 않을 그 때가 분명 돌아오고야 말텐데…더 늦기 전에 한국정부는 그 들에게 기념 핀이라도 하나 가슴에 달아주며 감사의 마음을 작게나마 전할 수는 없는 것일까? 그 날, 내 가슴속에 쿵쿵 대포소리 만큼 큰 아픔을 남기면서 땅바닥에 굴러 떨어진 잔해는 58년 전 한국전참전용사들의 목숨처럼, 활짝 핀 채 져버린 장미꽃, 장미꽃송이…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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