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곱게 늙는 법

2008-07-07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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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휘(언론인)

따가운 여름 햇살을 피해 오후 늦은 시각, 한강 고수부지를 걷고 있는데 한쪽 팔 다리가 불편한 노인이 터덕거리며 걸어오고 있다.

“저런 모습으로 오래 살면 뭘 하나” 무심결에 혼자 중얼거린 아내의 말이다.그러나 나의 생각은 다르다. 저 분은 걷는데 얼마쯤 불편할 따름이다. 장애인이 부자유스러운 육신의 핸디캡을 가지고도 한평생 삶의 의미와 보람을 챙기며 살아가듯 저 노인에게도 사는 의미를 부여하는데 인색해서는 안된다.


20대 젊은이가 노인을 보면 답답하고 측은한 마음이 들 것이다. 바쁠 때 뛰지 못하고 계단을 단숨에 오르지도 못하며, 툭하면 건망증으로 잊어먹고, 패기와 용기도 없어 보인다. 미래의 희망과 비전도 접어둔 채, 별 볼일 없이 밥이나 축내는 짐덩이로 비쳐질 수도 있다.그러나 인간은 그런 잣대로만 재단해서 판가름할 단순한 존재가 아니다. 이 세상은 생산적 연
령층만의 무대가 아니다. 아녀자는 아녀자대로, 노인은 노인대로 각기 자기의 살아갈 몫이 있고 역할이 있다. 남자와 여자, 젊은이와 늙은이, 부자와 가난한 자가 한데 어울려 서로 도움을 주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다투어가며 대를 잇고 역사를 일구어내는 게 인생살이다. 때로는 번뇌하고 때로는 은총을 감사하면서...

노인은 물리적 완력이 약하다. 기억력과 지구력도 부족하다. 그러나 경험과 지혜가 있다. 조급하지 않으면서 느긋하고 올바르게 판단할 수 있는 축적된 노하우가 있다. 완고한 고집스러움만 다스린다면 좋은 조언자가 되고 훌륭한 협조자가 될 수 있다.100미터를 10초대에 주파하고, 눈 덮힌 히말라야 산정을 정복하며 달나라를 왕복하는 일은 젊은 사람에게 맡기면 된다. 매사를 챙기며 젊은이들을 피곤하게 하거나 부담을 주는 무모한 간
섭자나 잔소리꾼이 되어도 안 되거니와 그렇다고 젊은이의 눈치나 보며 외곽으로 겉도는 신세가 되는 것도 좋은 모습이 아니다.

우리에게는 서구 사람들이 갖지 못한 우리만의 전통과 미덕이 있다. 이제 21세기에 알맞는 부자유친(父子有親), 장유유서(長幼有序)의 한국적 모럴을 숙성시켜야 한다. 요즈음 효경(孝經)이나 명심보감의 효도를 바라는 부모는 없다. “이 세상에서 불효보다 더 큰 죄는 없다”고 한 말의 뜻을 귀담아 듣는 자식도 없다. 이제는 낡은 것과 새로운 것, 고유의 것과 외래의 것 중에서 지닐 것과 버릴 것, 배척할 것과 받아들일 것을 추려 젊은이와 늙은이가 함께 공유해야 한다.나이 들면 걱정이 많고 잔소리가 는다. ‘걱정도 팔자’라는 말을 자식으로부터 자주 들으면서도 고치질 못한다. 하지만 젊은이도 귀담을 말이 있다. ‘어린아이 말 거짓 없고, 어른 말 그릇된 데 없다’는 속담은 만고의 진리이다. 어른의 말을 노상 반복되는 잔소리로만 치부해 버리는 교만은 버려야 한다.

피가 되고 살이 되는 말씀은 성경이나 경전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유식한 학자나 지체 높은 인물만 지혜로운 말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진정으로 사랑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말이 진짜 이로운 말씀이다.틀에 박힌 잔소리에서 벗어난 노인, 나이든 어버이의 말씀을 경청하는 아들 딸 - 그들은 그 이상 짐이 되는 사이가 아니다. 시간과 공간을 공유하며 상대적 존재의 의미를 인정하는 연고자의 관계에서 서로 빈 자리를 채워준다.
늙으면 하염없이 외로워진다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나야 한다. 육체적 움직임을 귀찮아 하고 정신적 활동을 포기하는 것은 곱게 늙는 지혜가 아니다. 60이 넘어도 테니스를 하고, 일흔이 되어도 독서에 몰입하는 노인은 존경스럽다. 여행을 즐기고 젊은이와 대화가 통하는 사람은 나이 들어도 불행을 모른다.

관능을 넘어선 노부부의 잔잔한 사랑은 주변의 부러움을 산다. 자녀의 행복을 함께 기뻐하고, 그들의 고통을 같이 아파하며 살아가는데 어찌 세상에서 소외됐다고 하겠는가.손자와 더불어 어린 시절로 돌아가 보자. “인생의 첫 걸음과 마지막 걸음은 리듬이 같은 원둘레 위에 있어 호흡이 맞는다”고 한다. 어린아이와 노인의 체력은 조화를 이루어 놀이 상대역으로 알맞다. 탈무드 얘기를 들려주고, 사는 이치를 가르치는 유대인 할아버지처럼 손자에게 들려줄 얘깃거리는 많을 것이다. 백지 위에 처음 그려질 그림은 아름답고 순수하다. 손자가 어떤 그림을 그릴 것인가를 인도하는 역할을 맡는 것은 얼마나 즐거운가.

자기 돈 아까운 줄만 아는 수전노, 혼자 잘난 체하고 타협과 융화를 모르는 외고집, 다른 사람의 행위를 통제하려 드는 간섭자, 사소한 일에 화를 내며 쌈닭처럼 대드는 왈패는 기피 인물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노인 특유의 결점을 깨달아 가진 것 있으면 베풀고, 겸허와 친절을 솔선하며 경험과 우정을 나누는 노인은 곱게 늙는 법을 터득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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