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기자의 눈/ AP 이탈리아어 vs. AP 한국어

2008-07-02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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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은(취재1부 부장대우)

지난 4월 칼리지보드가 2009~10학년도부터 이탈리아어, 불문학, 컴퓨터 사이언스 AB, 라틴문학 등 4개 AP과목시험 폐지를 발표하고 두달이 지난 6월 말 갑자기 이탈리아어 AP시험에 한해 원래대로 유지하겠다는 새로운 결정이 나왔다.

칼리지보드의 뜬금없는 이러한 번복 결정 배경에는 이탈리아 정부의 노력이 숨어있었다. 주미 이탈리아 대사가 5월21일 뉴욕의 칼리지보드 본부를 직접 찾아와 관계자들과 만나면서 AP 이탈리아어 시험의 존속을 공식 요청했다. 뿐만 아니라 앞으로 시험 응시자를 늘리기 위한 대책반을 만들겠다는 약속까지 하고 헤어졌다. 당초 저조한 응시율이 시험 폐지를 결정한 이유였기 때문이다.


이탈리아 정부는 대책반 활동을 통해 앞으로 AP 이탈리아어 시험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기금을 조성하겠다는 강한 의지도 전달했다. 지난 5년간 이탈리아 정부로부터 이미 엄청난 자금을 지원받았지만 칼리지보드는 그간 AP 이탈리아어 시험 개발과 운영에 지출된 비용이 공식 지원된 자금을 초과했다며 엄살을 떨었기 때문이다. 칼리지보드는 주미 이탈리아 대사와의 공식 만남 후 “AP 이탈리아어 시험의 중요성을 높이 평가해왔다. 앞으로 이 시험이 수십 년, 나아가 세대에서 세대로 오래토록 이어지길 바란다”는 아부성(?) 발언까지 하며 입장을 180도 바꿨다.

‘비영리’라는 타이틀을 갖고 있는 칼리지보드지만 SAT를 비롯한 각종 입학시험을 핑계로 학생들을 볼모로 삼아 엄청난 자금을 유치해왔고 이 때문에 여기저기서 비난도 많이 받아온 터라 사실 이번 번복 조치가 그리 새삼스러울 것은 없다. 다만 한 국가의 외교사절이 제 발로 직접 자신들의 사무실을 찾아와 머리를 조아리게 만드는 그 힘 앞에서는 사실 뭐라 할 말이 없어진다. 미국의 시험제도 현실을 전혀 무시할 수만은 없기 때문이다.

중국어 AP 과목이 생기기 전에는 중국의 교육부 장관이 직접 칼리지보드를 다녀갔다. 이후 칼리지보드는 미국 공립학교 교사들을 장·단기로 중국에 데려가 연수시키는 프로그램 등을 대대적으로 홍보했고 미국의 주요 일간지마다 ‘미 공립학교의 중국어 교육 열풍’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마구 쏟아냈었다.이번에 구사일생으로 부활한 이탈리아어 AP시험도 그렇고 중국어 AP시험도 모두 미국내 이탈리안 및 중국 이민자 지역사회는 물론, 각 해당 국가의 정부가 깊이 개입됐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현재 뉴욕을 주축으로 한 미주 지역 한인사회 관계자들도 지난해 말부터 본격적으로 한국어를 미 공립학교에 정식 제2외국어 필수과목으로 개설하려는 노력을 펼쳐오고 있다. 필수과목 개설은 한국어 AP시험 개설에 앞서 필수적으로 거쳐야 하는 선행 절차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아직까지 한국 정부의 적극적인 개입이나 눈에 띄는 지원은 찾아보기 힘들다. 다 차려
진 밥상에 와서 숟가락만 얹고 겸상을 하려는 생각이 아니라면 지금부터라도 한인사회의 관련 노력에 동참하는 모습을 보여주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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