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하루가 쌓여 역사가 되다

2008-06-23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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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병렬(교육가)

한국에서 편지 한 통을 받고 반가움으로 가슴이 꽉 찼다. 56년 전 학생이 보낸 것이다. 그것도 그 당시 받은 성적표와 그의 현재 사진과 함께. 한국 동란 중 근무교는 부산 대신동에 천막을 치고 학생들을 모아 공부를 가르쳤다. 교실 대용으로 군대에서 불하받은 천막 지붕에 뚫린 구멍으로 빗물이 샜다. 비가 내릴 때마다 빗물방울은 그 아래 놓인 양동이에서 딩동딩동 음악을 연주하였다. 그래도 매일 깔개와 화판을 짊어지고 보수산에 오르고 내리던 것보다 낫다는 생각을 하던 시절의 학생이다.

어렸을 때부터 눈여겨 본 대로 그는 한국에서 중·고등학교를 마친 후, 미국에 유학하고 한국내 큰 회사에 근무하다가 현재는 명예 퇴직을 한 상태라고 한다. 새삼스럽게 한국내 인적 자원 낭비를 개탄한다. 그가 동봉한 단기 4286년(1953년)에 발행한 성적표는 지질과 인쇄술이 전쟁시절을 여실히 반영하고 있었다. 한 가지 위안을 받은 일은 기재사항을 성실하게 기록한 자신의 태도였다. 이토록 오랜 세월 보관될 줄 미처 몰랐지만 다행한 일이라고 느꼈다.


사람의 일생은 길기도 하고 짧기도 하다. 그 일생 동안을 유년기·소년기·청년기·장년기·노년기 등으로 크게 나누어 볼 때 어느 시기거나 삶의 즐거움이 있다고 본다. 몸과 마음이 자라나는 성장기, 삶의 방법을 배우고 익히는 학습기, 일에 열중하는 활동기, 몸과 마음이 익어가는
성숙기, 업적을 챙기는 수확기, 주위 환경을 정리하는 정리기 등 생활 환경에 따라 다른 즐거움이 있다고 본다.

나이 많은 사람들은 무슨 재미로 살까. 이것은 주위에 있는 사람들의 생각이고, 본인은 살만한 재미를 느낀다고 하겠다. 그 중의 하나가 인간의 생활이나 사회의 발전사를 몸소 살아보고 지켜보는 재미는 비교할 것이 없다. 내 자신이 겪어본 것만 예거해도 한이 없다. 일상 생활 양식,
생활용품, 사회의 규범, 언어의 변천, 의상의 유행, 옳고 그른 것의 판단, 자녀 양육 방법, 교육의 목적 등이 살아서 움직이면서 역사를 엮어나가고 있다. 나이가 많아지면 역사책을 읽지 않고도 이런 흐름의 주인공이였기에 잘 알고 있다.

‘역사’를 ‘인간 사회가 거쳐온 변천의 모습, 또는 그 기록’이라고 하는 것은 사전적 의미이다. 우리들은 역사의 주인공이고, 우리의 일상생활은 역사의 흐름 속에 있다. 우리의 생각이나 생활 모습은 역사를 만들면서 커다란 흐름으로 시대를 엮어가고 있다. 이렇게 생활한 기간
이 길면 길수록 역사란 자기 자신과 주위 환경과의 변천사가 되며 개인 생활과도 불가분의 관계가 된다.

옛날 이 학생을 중심으로 생각해 보아도 그 둘레를 에워싸고 있는 온갖 역사의 흐름이 보인다. 역사란 한 마디로 한다면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 짧은 하루가 쌓여서 이루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하루의 무게를 느끼게 된다. 그리고 역사의 흐름 속에서도 중요한 것은 사람
들이 주고 받는 마음의 교류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역사를 빛내고 이어가는 가장 순수한 것으로 안다.

이상한 일이다. 이 학생의 편지를 읽고 있으니까 지나간 56년이 일순간에 날아가 버렸다. 키는 크지만 매우 수줍던 어린이가 바로 옆에서 그렇게 서 있었다. 그 때의 어느 날 한 순간이 오늘과 겹치고 말았다. 역사는 이렇게 신축성이 있는 모양이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고마운 일이
다. 이런 독특한 즐거움을 느낄 수 있으니까. 역사는 다채로운 하루가 모여서 이루고 어느 순간에 재생되는 즐거움을 준다.예고도 없이 날아온 편지는 필자의 개인사를 되돌아보게 하였고, 사회 변천사를 깨닫게 하였고,
시공을 넘나드는 인간의 정을 다시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바람직한 역사를 엮으려면 좋은 하루하루를 쌓아올려야 함을 깨닫게 하였다. 역사는 끊임없이 이어지는 것이 생명이고, 설혹 흥하고 망하고, 강하고 약한 리듬이 있더라도 꾸준한 생명력을 잃지 않는 것이 중요하
다고 생각한다.

편지 끝에 적은 ‘선생님의 제자’라는 말이 고맙지만, 이렇게 바꿔주길 바란다. ‘선생님의 옛 친구’라고. 지금은 우리가 친구되어 같이 지내고 싶다. 오래 된 꽃밭에서 만났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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