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칼럼/ 아직도 뭘 모르는 이명박 정부

2008-06-13 (금)
크게 작게
이기영(고문)

요즘 한국에서는 미국 쇠고기를 반대하는 촛불시위로 온 나라가 시끄럽다. 벌써 40여일간 아이고 어른이고 모두 촛불을 들고 나와서 소란을 피우고 있는데 정치는 뒷짐만 지고 해결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정부는 이런 소란의 원인에 대해서는 대책없이 경찰을 동원하고 방벽을 쌓
아 시위를 막는데 급급하고 있다. 6.10항쟁 기념일인 지난 10일에는 전국에서 수 십만명이 촛불데모를 하여 세계 여러 나라에서 뉴스거리가 됐다. 정말로 나라 꼴이 말이 아니다.

그런데도 이명박 정부의 대응은 한심하기 짝이 없다. 해결책으로서 내놓은 것이 인적 쇄신이다. 장관들과 청와대 비서진을 교체한다는 것이다. 이번에는 ‘고소영’ ‘강부자’라는 말을 듣지 않게 고대 출신, 영남 출신, 30억 이상 재산 소유자를 배제한다는 것이다. 또 국무총리에 박근
혜 전 한나라당 대표를 기용한다는 말도 나오고 있다. 물론 인적 쇄신도 필요하다. 그러나 지금 촛불데모는 그게 아니지 않는가.


쇠고기 협정을 재협상하란 말이 아닌가. 더우기 특정 학교와 지역 출신, 재산가를 배제하는 것이 인적 쇄신이라고 생각한다니 어이가 없다. 그리고 박근혜 전 대표는 무슨 대용품인가. 지금 국무총리를 하라고 그가 하겠는가. 그리고 박근혜가 국무총리를 한다고 민심이 가라앉겠는가.사람의 병을 초기에 잡지 못하여 심해지면 그 병을 고치기가 그만큼 어려워지듯이 정치적, 사회적 문제도 심화된 후에는 간단한 처방으로 해결할 수 없게 된다.

건국 후 지난 60년간 한국에서 발생한 몇 차례의 대규모 국민저항운동을 보면 모두 그만한 대가를 치루고 해결됐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4.19혁명이다. 자유당 정부가 독재정치를 하다가 정권 연장이 어렵게 되자
3.15 부정선거를 했는데 결국 국민들의 분노를 사서 정권이 몰락하고 만 것이다.또 1960년대와 1970년대에는 공화당의 강권정치로 학생데모가 심했고 1980년에는 5.18 광주 민주화운동이란 큰 사태가 발생했는데 이와같은 저항운동은 모두 군사정부의 무자비한 탄압으로 저지됐다. 그러나 그 후유증이 얼마나 심각했던가는 우리가 모두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1987년에 발생한 6.10항쟁은 대통령 직선제를 요구하는 국민들의 여론을 무시하고 간선제 헌법을 고수하려던 전두환 정부에 반대한 운동이다. 이 결과 정부는 국민의 요구를 100% 수용함으로써 사태가 진정됐다. 그리고 직선제 개헌을 통해 노태우 대통령이 당선됨으로써 오히려 정권 연장에 성공했다. 2002년 발생한 반미 촛불시위는 노무현 대통령을 당선시켜 반미좌익 정권을 창출하면서 사그러졌다.

이처럼 대규모 시위는 3가지 방법으로 끝나게 된다. 첫째, 철저한 탄압으로 분쇄되거나 둘째, 정권을 밀어붙여 붕괴시키거나 셋째, 정부가 능동적으로나 수동적으로 요구조건을 수용함으로써 끝장이 난다. 능동적 수용은 6.29선언처럼 요구조건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것이며 수동적 수용은 노무현 정부의 출현처럼 지지세력의 집권으로 요구조건이 충족되는 것이다.
지금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쇠고기 파동은 일부 선동세력의 반정부운동에 악용되고 있는 일면이 없지 않다. 그러나 사태가 이처럼 확대되도록 방치한 정부가 그 책임을 지지 않으면 안된다. 정부가 쇠고기 협상이 잘 된 것이라고 생각하더라도 그런 생각을 국민들에게 확신시키지 못했다면 국민들의 반대에 부딪치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다. 그리고 국민들이 반대한다면 그 반대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번 쇠고기 파동에 대해 이명박 정부는 “재협상이 어렵다”고 하고 있고 미국정부는 “재협상을 하지 않을 것이다”고 거듭 주장하고 있다. 쇠고기 협정의 재협상을 요구하는 국민여론과는 정반대로 마주 달리는 기관차처럼 충돌할 수밖에 없다. 이런 위험한 충돌로 큰 사고가 나려고 하는데 기관차를 세울 생각보다는 인적 쇄신이니 다른 정책으로 충돌을 막아보겠다는 생각인 모양이다.

이번 촛불시위는 이미 저절로는 사그러질 수 없을 만큼 커진 국민저항운동이 되어버렸다. 정부가 요구조건을 수용하지 않는다면 정부 자체를 부인하는 반정부 운동으로 확대되고, 나아가서는 미국을 배격하는 반미운동으로 변질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정부가 강력한 탄압으로 저항운동을 꺾어야 하는데 오늘날 민주화된 한국에서 가능한 일일까. 결국 차기 선거에서 반미좌익 정권이 집권하는 길을 터주게 될 것이다.그러므로 이명박 정부는 이 쇠고기 파동의 중요성을 심각하게 인식해야 한다.

쇠고기 협정을 재협상하다가는 한미 FTA에 지장을 받는다고 생각할 일만이 아니다. 쇠고기 때문에 동북아의 균형이 무너지고 한국의 운명이 바뀔지도 모른다. 제방에 난 조그만 구멍 때문에 제방이 무너져서 홍수가 나듯이 하나의 사소한 사건이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어 놓은 예가 얼마든지 있다. 쇠고기가 그 조그만 구멍이 되지 않아야 한다는 말이다.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