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칼럼/ 역사교육 망치는 역사 교과서들

2008-03-28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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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영(고문)

한국에서 좌파 정권이 집권했던 지난 10년 동안에는 많은 제도적 변경과 인적 교체가 이루어졌지만 가장 심각한 변화는 과거사에 대한 평가와 역사관을 근본적으로 뒤바꿔 놓은 것이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역사교육 내용인데 지난 2002년에 검정에 통과되어 2003년부터 고교에서 사용되고 있는 6종의 역사 교과서는 민중·민족주의 입장에서 한국 역사를 기술했으며 현대사에서 다분히 친북 경향을 띠고 있다.

현행 고교 역사교과서는 일제시대를 일제와 친일파 기득권 세력에 대한 민중과 민족 세력의 저항사로 규정하고 있다. 또 이승만 정권을 반공주의에 입각한 독재정권이며 친미 사대정권으로 보는 등 대한민국 60년사를 매우 부정적으로 평가한다. 한일회담은 일본의 식민 지배를 용인한 반민족적 합의이고 6.15 정상회담은 한반도의 통일과 평화 정착, 민족의 화합과 단합을 논의한 회담으로 극찬하고 있다. 교과서에는 미국이 6.25 남침을 유도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전교조 교사들은 아예 미국이 북침을 했다고 가르치고 있다.


이런 내용은 분명히 잘못된 관점에서 사실을 왜곡한 것이다. 일제시대 기득권 세력에 대한 반대는 일부 공산주의자들의 사상이었다. 이승만 정권을 친미정권이라고는 할 수 있겠지만 사대정권으로까지 매도한 것은 북한이 말하는 남조선 괴뢰정권과 일맥상통하는 말이다. 6.25는 최근 러시아의 비밀문서에서 밝혀진 것처럼 김일성이 스탈린의 지원 약속을 받고 남침한 것이 확실한 사실이다.

이런 사실 왜곡을 바로 잡겠다고 최근 뉴라이트 계열의 교과서 포럼이란 모임에서 ‘대안교과서 한국의 근·현대사’를 발간했다. 좌경 편향을 시정하고 지나친 민족주의에서 탈피하여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옹호하고 친북사관을 바로 잡겠다는 취지란다. 그런데 대안교과서도 또한 문제가 많다.
이 교과서에는 대한민국의 건국 세력이 친일파였다는 좌파의 시각에 맞서 “근대적 문물을 수용하면서 전문적인 직업 능력을 키워온 민족주의자들”이라고 했다. 이승만은 대한민국의 기틀을 세운 공로자로 묘사하고 김 구는 “남북협상이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했으며 이후에도 대한민국 건국에 참여하지 않았다”고 폄하했다.

해방 직후의 국제정세와 한반도의 사정을 감안한다면 이런 단순 기술은 잘못된 것이 아닐 수 없다. 한반도가 미군과 소련군에 의해 양분되어 점령된 상태에서 북은 소련군의 지원을 받은 김일성이, 남은 미국에 인맥을 구축하고 있던 이승만이 정치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있었고 상해 임시정부 출신인 김 구의 입지는 매우 어려운 처지였다. 이런 상황에서 남북에 각각 정부가 수립되자 통일정부를 주장했던 김 구는 남한정부의 건국에서 배제당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도 상해 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었다고 헌법에 명시된 대한민국의 건국 초기에 임시정부를 이끌어온 김 구의 위상이 무시될 수는 없다.

이승만 정부 출범 때 일제의 관료와 군인, 경찰에서 일했던 친일파 인사가 대거 등용되었던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 교과서에 있는대로 일제시대에 “전문적인 직업능력을 키워온” 사람들 중에는 친일파가 많았다. 이들의 전문적 능력이 필요했기 때문에 친일파가 다시 세력을 잡게 되었고 이들이 국회에서 만든 반민특위까지 무산시킬 수 있을 만큼 세력이 컸다. 대안교과서는 이 사실을 숨기고 있다.더 큰 문제는 일제식민통치에 대한 평가이다. 대안교과서는 “일제의 한국 지배는 한국인의 정치적 권리를 부정한 폭력적 억압체제”라면서 “억압과 투쟁의 역사만은 아니었고 근대 문명을 학습하고 실천함으로써 근대 민주국가를 세울 수 있는 시민적 능력이 두텁게 축적된 시기였다”고 했다.

언뜻 보면 그럴듯한 말이다. 일제시대라고 해서 사람이 살지 못하는 지옥같은 시대는 아니었고 조선이 대한민국으로 이어지는 발전과정의 시대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기간에 일제가 지배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런 발전이 없었겠는가. 우리 민족이 독립국가를 이루었거나 아니면 미국의 지배를 받았더라면 그런 발전과정이 더욱 촉진될 수도 있지 않았을까. 근대국가를 세우는 능력을 축적할 수 있었던 것이 일제시대에 대한 서술로는 매우 부적합하다고 할 수 있다.

제국주의 시대에 강대국은 모두 약소국을 식민지화하여 지배했지만 한국에 대한 일본의 지배처럼 철저한 지배는 그 예가 없었다. 일본은 ‘내선일체’라는 구실로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말살하려고 했다. 일본어를 국어로 삼고 창씨개명과 신사 참배를 강요했고 수많은 생명을 전쟁의 제물로 내몰았다. 그렇지만 조선인은 일본인에 비해 사회적인 천대를 받았다. 이런 일제 통치에 대한 평가를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다면 일제와 싸운 독립운동가들은 일제가 말한대로 ‘불령선인’이 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역사는 좋든 나쁘든 객관적 사실에 근거해야 하며 전체적인 파악에서 공과가 판단되어야 한다. 왼쪽으로만 보거나 오른쪽으로만 보는 평가는 진정한 역사가 아닌 것이다. 그런 점에서 현행 역사교과서나 대안교과서가 모두 잘못된 것이다. 이제는 사상과 이념을 벗어나 한국의 근현대사를 재검토하여 사실에 입각한 새 역사교과서를 다시 써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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