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이름마다 지닌 소망

2008-03-17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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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병렬(교육가)

우리에겐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이 있다. 선택할 수 있는 것이 많을수록 자유가 있다고 말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무리 자유가 많아도 도저히 자기 자신이 선택할 수 없는 것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태어나는 민족이나 국가이다. 둘째는 남녀의 성별이다. 셋째는 자기 이름이다. 아무리 재주가 있어도 어느 민족의 남자나 여자로 태어나서 어떤 이름을 꼭 가지겠다고 원하여도 그것을 이룰 수는 없다. 요즈음 후천적으로 국적이나 이름을 선택하는 일이 있어도 일반화된 일은 아니다.

미국에 이민온 한국인을 생각해 본다. 어느 기간이 지나 절차를 밟아 미국시민이 되었다고 하자. 시민이 되면서 미국이름으로 바꿨다고 하자. 이는 후천적으로 국적과 이름을 바꾼 것이다. 여기에 2세들이 태어나서 아예 처음부터 미국이름으로 시민권을 받게 된다. 이럴 때 성만 빼고는 서류상으로 일반 미국인과 똑같다.한국학교에 나오는 학생의 대부분은 한국식과 미국식의 두 가지 이름을 가지고 있다. 이 중에서 한국이름은 주로 가정과 한국학교 용이고, 미국이름은 주로 미국학교 용으로 사용되고 있다고 하겠다.


때로는 미국이름만 가진 학생도 있다. 그럴 때는 한국이름도 하나 지어주시면 좋겠다고 의견을 말한다. 그만큼 한국이름이 가지는 뜻이 크기 때문이다. 왜 그런가.한국문화와 미국문화가 상당 부분에서 정반대일 때가 많은데 성명의 경우도 그렇다. 미국이름은 사전 맨 뒤에 알파벳 순서에 따라 나와있을 정도로 그 숫자가 적다. 그것은 참고자료일 뿐이고 각자가 짓는 개성적인 이름도 있겠지만 그래도 성보다는 이름의 수효가 훨씬 적다고 본다. 그래서 사람들이 모이면 같은 이름이 많다. 하지만 한국은 성과 이름의 수효가 반대이다.

성씨의 수효는 3백이 못 되지만, 성 밑에 붙어다니는 이름의 수효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그 이유는 성은 대대로 이어지지만 이름은 부모의 창작이기 때문이다.그많은 김씨, 이씨, 박씨를 어떻게 구별하느냐는 미국사람의 질문을 곧잘 받지만 성과 이름을 붙이면 똑같은 때가 그리 많지 않다. 그리고 조부모나 부모가 창작한(때로는 작명사의 도움도 받지만) 이름에는 각별한 소망이 가득 담겨 있다. 오복을 기원하거나, 부모가 소중하게 여기는 가치관이 반영된다. 그것들을 상징하는 뜻깊은 한자를 찾아 이름으로 사용하기도 하고, 고유한 한국말 중에서 부모의 기원이 담긴 고운말을 선택한다.

학생들의 다양한 한국이름을 보면서 그 부모들의 자녀에게 바치는 사랑과 정성을 깨닫기도 한다. 그래서 자녀들이 한국이름도 가지기를 희망한다. 그들이 자라면서 부모가 자신에게 바라는 것을 깨닫게 하고 싶다. 부모의 끝없는 사랑을 느끼게 하고 싶다. 때로는 학생들에게 한국이름이 가지는 뜻을 부모에게 듣고 오라는 숙제도 내준다. 그들은 샛별같은 눈을 반짝이며 제 이름이 가진 뜻을 내게 알려준다.이름은 누구에게나 소중한 것이다. 우주 속에 존재하는 온갖 사물과 모든 현상에는 제각기 다른 이름이 있다. 내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을 만나면 고맙고 반갑다. 그렇다면 다른 자연물이나 사람의 이름도 바르게 불러야 하지 않겠는가. 이름이란 바로 그 자신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이름 사랑의 이유가 있다.

우리들은 자연스럽게 내 자신을 대신하는 이름을 사랑과 자랑으로 대하게 되며, 이름에 상처가 가지 않도록 노력하게 된다. 이런 현상이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속담으로 이어진다. 이 만큼 이름은 소중한 것이다.처음에는 한국이름이 불려도 대답을 못하던 학생들이 요즈음은 ‘네’하는 대답에 익숙해졌다. 이런 경향이 한국문화에 가까이 가는 첫걸음이라고 본다. 이름이 두 가지 있어서 거치적거릴 것도 아니다. 본인이 이를 자유롭게 사용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마음대로 불리우면서 특별한 일상을 보낼 수 있는 것도, 거주지를 바꾼데 따르는 변화이다.

말하자면 미국식 이름이 있더라도, 한국식 이름을 갖도록 권한다. 한국식 이름으로 불릴 때마다 한국혼을 불어넣을 수 있는 귀한 작용을 하기 때문이다. 철이야, 고운아, 보람아, 복길아, 나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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