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소주 문화

2007-09-22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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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철우(아트갤러리)

사람과 ‘술’은 매우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옛날이나 지금, 동양이나 서양, 사람이 살고 있는 곳은 늘 술이 있다. 술은 사람들이 살아가는데 음식과 함께 빼놓을 수 없는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를 끈끈하게 맺어주는 연결 고리 역할을 하기 때문일 것이다.

때로는 과음으로 말미암아 불미스러운 일들이 종종 일어나곤 하지만 껄끄러운 인간관계를 술로서 부드럽게 맺어주는 역할 또한 부정 못할 것이다.
술 때문에 망한 사람, 술 때문에 흥한 사람, 헤아릴 수 없이 많고 많은 사건들이 옛날부터 있었으며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일어날 것이다.
술의 백과사전을 보면 사람이 태어나기 전부터 술은 존재했었다. 천연 과일들이 바위 틈새에 떨어져 자연발효된 것을 원시인들이 마셔보고 얼마나 신비스럽게 여겼을까, 그것이 술이다.소주는 우리나라 주식인 쌀과 옥수수 같은 잡곡을 누룩과 함께 발효해서 무색 투명하게 맑게 만든 우리나라 고유의 술이다. 60년대 우리나라 소주 종류는 무려 50개가 넘었다. 북한까지 합친다면 그 종류는 더 다양했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필자는 북쪽은 갈 수가 없었기에 자세히 모른다.


남쪽은 동쪽 휴전선 끝에서부터 아래로 속초의 ‘진향소주’와 ‘궁로소주’, 강릉의 ‘경월소주’와 ‘해당화 소주’, 동해시(당시는 묵호)의 ‘동호소주’와 강호소주’, 삼척, 울진, 영덕, 포항, 경주, 울산, 부산까지 내려오면 동남쪽 끝 부산의 ‘대선소주’, 서남쪽 끝 목포의 ‘삼학
소주’, 서해안 군산의 ‘백화소주’.지방 곳곳 가는 곳마다 색다른 소주가 있었다.배 고팠던 시절, 박정희 정부는 생산, 수출만이 국가 부흥의 지름길이라 믿고 모든 산업화의 기초부터 다져 나갔다.세계화에 발 맞추어 종전에 사용하던 단기능 서력으로 길이, 무게, 부피 같은 단위도 서구식으
로 센티미터, 그램, 미터로 바꾸었으며 그러한 과정에서 생산성이 취약한 작은 소주회사들은 반 강압적으로 대기업에 합병 또는 스스로 문을 닫게 만들었다.

특히 부족한 쌀을 메꾸기 위해 통일벼를 개발하였으며 쌀을 원료로 사용하는 술 생산은 법으로 금지시켰다. 소주는 희석식만 생산하게 되었고 막걸리(농주) 또한 주원료를 밀가루로 대처하였다.지금 생각하면 독약과도 같은 밀가루에다 카바이트(Carbide) 화공품을 섞어 만든 막걸리 한 사발, 그것이 그렇게 꿀맛 같았을까? 어디 그 뿐이랴. 담배꽁초를 끓여 커피라고 속여 팔다 걸려들어간 웃지 못할 시절이었으니...

반 세기가 지난 지금, 뉴욕 한식식당에는 이름도 들어보지 못했던 새로운 소주가 마치 춘추전국시대를 방불케 한다. 거기에다 한술 더 북한 평양에까지 소주가 왔다니 남성 넥타이가 넓어졌다 좁아졌다 하듯이, 여성 치마자락이 짧아졌다 길어졌다 하듯이 소주 종류 또한 다시 많아지는 것은 대단히 환영할 일이다.우리 소주를 옛처럼 다시 각 지방마다 특색을 살려 새로운 향기와 맛을 개발하여 세계 방방곡곡 IT산업 못지않게 발전하기를 기대해 본다.

특히 옛 소주는 기술적으로 도수를 높이는 것이 자랑이었다. 보통 소주는 20도에서 35도 사이였는데 안동 소주는 40도라고 자랑한 것을 기억한다. 그러나 지금은 건강에 초점을 맞추어 도수를 최대한 내리는 기술을 필요로 할 것이다.반대로 한국에서는 와인 붐이 불어닥쳐 와인을 알면 유식하고 와인을 모르면 무식한 것처럼 행세를 한다니 심히 유감스럽고 개탄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럴 때일수록 미국생활 하는 우리들은 소주 문화를 발전시켜 외국인들에게 한류 붐과 함께 소주 자랑을 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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