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국수 맛을 알면 코리언이 된다

2007-09-24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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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효섭(목사/아동문학가)

2세들은 “도대체 한국적인 것(Koreaness)이 무엇이냐?”고 묻는다. 말로 설명하기 힘든 질문이다. 그것은 몸으로 터득하고 가슴으로 느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국수 맛을 알면 코리언이 된다”고 대답한다. 막국수의 텁텁함, 콩국수의 구수함, 칼국수의 소박함, 메밀국수의
덤덤함, 냄비국수의 다정함, 냉면의 짜릿함, 가락국수의 맑음 등을 알면 이제 그는 한국인이 거의 된 것이다.

라면은 속성이고 얄팍한 맛이어서 한국적인 것에 넣고 싶지 않다. 빨리 해치우고 임기응변으로 그 자리를 메우는 재주를 한국인이 가졌다지만 길게 보면 이것은 효과적이 못되며 미국과 같은 대륙에 사는 기질에 어울리지 않는다. 라면보다는 칼국수의 은근함으로 나가는 것이 대륙에 맞
는 생활철학이다.국수의 맛은 긴데서 온다. 부셔진 라면을 숟가락으로 퍼먹어 본 사람은 국수의 맛과 길이가 함수관계에 있음을 잘 알 것이다. 냉면을 시키면 종업원이 무시무시한 가위를 들고 와서 “잘라
드릴까요?” 하고 말한다. 듣기에 따라 겁나는 말이다. 자르라고 하면 서슴없이 냉면발을 네 동강이로 참형에 처해 국수의 특색을 없애버린다. 함흥냉면 쯤 되면 끊으려야 끊을 수 없는 관계에 놓이기 때문에 도중에 숨을 돌이키고 눈물을 닦는 휴식을 취하더라도 일단 시작한 국수발은
끝장을 내야 국수의 진미를 안다.


끈질기고 꾸준함은 국수한국의 장점인데 요즘은 본래의 인내력이 한국인에게서 많이 사라지고 있는 것 같다. ‘물고 늘어지는 것’은 좀 독한 표현이지만 한 번 시작했으면 끝장을 내는 장인정신이 성공으로 이어진다. 갈아치우는 것이 반드시 최선책은 아니다. 고칠 것은 고치고 더
잘 하도록 키워주는 것이 상책이 될 수도 있다.중국에서 4천 년 전의 국수가 발견되었다고 하니 국수의 역사는 최소 4천 년은 되었다. 그러니 젓가락의 역사도 4천 년으로 보아야 한다. 국수는 젓가락이 아니면 먹을 수도 없고 맛도 나지 않는다. 어느 식당에서 한 아이가 냉면 사리를 스파게티 먹듯 숟가락에 둘둘 말아서 입에 넣는 것을 보았는데 보기만 해도 입맛이 떨어진다. 스푼이나 포크로 국수를 먹을 수도 없고 만일 고
대인이 국수를 손가락으로 먹었다면 가느다란 국수보다는 수제비가 나았을 것이다. 젓가락으로 국수를 먹는 모습은 하나의 예술이다. 젓가락은 두 개의 가락이 서로 어울리고 협조하며 공중에서 춤을 추듯 작업을 진행한다. 서양인의 포크는 찌르고 나르는 기계적인 동작 뿐이고 아름
다움이 전혀 없다.

젓가락은 포크처럼 공격적인 것이 아니다. 포크나 나이프는 사람을 다치게 할 수 있지만 젓가락으로 다쳤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 포크는 찌르는 기능을 가졌고 젓가락은 집는 기능을 가졌다. 나는 큼직한 나무젓가락을 좋아하는데 그것은 한국인의 멋인 소박함과 단조로움과 걸
쭉함이 스며있기 때문이다. 두 개의 젓가락은 하모니를 만드는 가락이며 정을 창출하는 예술품이다. 이중창이나 마찬가지이다. 두 가락을 한 손으로 조화시키는 데 한국인의 정과 의가 흐른다.

포크는 나르는 도구이고 젓가락은 춤추는 예인이다. 서양 식탁에는 포크와 함께 나이프가 놓인다. 그래서 식사가 칼질이 된다. 포크는 서구인의 실용주의를 대변하고 젓가락은 한국인의 심미주의(Estheticism)를 대변한다. 한국인의 심미주의는 감정주의라고도 말하며 ‘정’과 ‘흥’으
로 표현된다. 젓가락 놀림에는 ‘정’과 ‘흥’이 모두 들어있다. ‘정’과 ‘흥’은 적절한 영어 표현이 없고 한국인 특유의 한국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한국인은 정으로 살고 흥으로 산다. 정 때문에 ‘이웃사촌’이 되고 가정도 회사도 교회도 정으로 꾸려 나간다.
정을 드러낸 한국 식탁이 냄비찌개, 뚝배기, 국수전골 등이다. 이것들은 본래 식탁에 하나만 놓고 온 식구의 숟가락과 젓가락이 드나들게 되어 있다. 그래서 마음과 마음이 통하고 정이 오가는 한국의 맛이다. 냄비 음식은 식탁의 예절과는 거리가 멀다. 마음 터놓고 사귀고 거리낌 없이
이야기하고 국물을 뜨겁게 나누어 마시는 정의 맛이다. 정은 ‘유대’이다.

‘정들자 이별’이라는 말은 마음의 유대가 생기자마자 몸이 헤어진다는 뜻이다. 그러나 한 번 맺어진 정은 몸이 떨어져도 쉽게 끊어지지 않는다. 정이 유대이기에 정은 단결의 힘이 된다.정은 무엇이나 접착시키는 마술 시멘트 같다. 그래서 정을 나쁜 무기로 이용하면 지연, 지방색
등의 정치적 무기가 되기도 한다. 정은 서로 믿게 하고 손을 잡게 한다. 한국인은 이념이 먼저가 아니라 정이 먼저이다. 아마도 천국이란 정든 사람들의 낙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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