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칼럼/ 역사의 평가

2007-09-14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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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영(주필)

미국의 역사를 보면 참으로 복 받은 나라라는 생각이 든다. 자연의 산물인 물질만 풍족한 것이 아니라 좋은 사람들이 때맞춰 나타나 미국이라는 나라를 만드는데 큰 기여를 했으니 말이다. 조지 워싱턴이나 토마스 제퍼슨, 벤자민 프랭클린과 같은 이른바 건국의 아버지들이 없었다면 오합지졸의 식민지를 끌어모아 독립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겠는가. 그리고 독립 후 연방국가로 결집시키고 지금도 세계인의 교과서가 되고 있는 민주주의를 정착시킨 것은 정말로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한 가정의 일을 생각해 보아도 어떤 사람이 가장으로 있고 위기에 직면했을 때 이 위기를 어떻게 타개해 나가느냐에 따라 가정의 운명이 결정된다. 현대그룹을 창업한 정주영씨의 경우 불우한 환경에서 한 개인의 노력으로 일가를 일으켰고 기업을 세웠을 뿐 아니라 국가 경제의 초석을 다지는데 큰 역할을 했다. 이처럼 흥망성쇠가 사람에 달려 있다. 한 국가에서도 어떤 사람들이 지배층을 담당하고 누가 지도자가 되느냐에 따라 운명이 엇갈린다.우리는 역사의 흐름이 구비치는 고비에서 어떤 사람이 나서서 어떻게 키를 잡느냐에 따라 역사의 방향이 달라진 것을 보았다. 미국이 노예제도를 둘러싼 분쟁에 휘말렸을 때 링컨대통령이 없었더라면 미합중국이 와해되었을 지도 모른다.


한국역사에서 이순신 장군이 없었더라면 한반도는 이미 오래 전에 일본땅이 되었을 지도 모를 일이다. 위대한 인물은 시대의 산물이기도 하지만 위대한 인물이 시대를 만들고 있는 것도 또한 사실이다.미국이라는 나라를 언뜻 보기에 참으로 복잡하고 허술하고 무질서하기가 짝이 없다. 일부 흑인지역과 히스패닉 지역의 빈민가를 보면 이런 나라가 어떻게 세계의 일등국가인가 하는 의구심을 떨칠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은 진정한 미국의 모습이 아니다. 미국의 경제를 떠받치고 있는 기업과 연구소, 시민정신에 투철한 중상류층의 시민들, 그리고 이들을 이끌었던 걸출한 지도자들의 덕분으로 정교한 사회조직이 완벽에 가까운 법제도로 통제되고 있는 나라가 미국인 것이다.

그런데 요즘 이 미국에서 근본적인 문제점이 드러나고 있다. 지도층의 지도력 부재이다. 레이건대통령 이후 국민들의 힘을 결집하여 국력으로 승화시킨 대통령 보다 정치기교와 당리당략에 치우친 대통령이 잇달아 나오는 경향이 있다. 그 중에는 정치력이 부족하여 현실문제에 적절히 대처하지 못한 경우도 있다. 그 결과 국내 경제는 점점 기울어지고 국제적 세력이 위축되면서 초강국의 면모를 잃어가고 있다. 9.11 테러 이후 추락하고 있는 미국의 위상을 보면 이 사실을 실감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이라크 전쟁에 대한 지지도 추락으로 이미 레임덕을 겪고 있는 부시대통령이 퇴임 후 자신이 어떤 평가를 받게 될 것인지 고민에 빠져있다고 최근 뉴스위크가 보도했다. 그런가 하면 이미 퇴임한 클린턴 전 대통령도 재임시 전쟁을 치른 경험이 없기 때문에 미국의 위대한 대통령의 반열에 오르지 못할 것을 걱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대통령을 하고 있을 때는 하고 싶은대로 했지만 그만두게 되면 후세의 역사 평가를 걱정하게 되는 모양이다.

한국사람들은 과거 세계사의 조류에서 배제되어 있었을 때는 과학기술의 후진성으로 인해 무지몽매한 민족으로 시련을 겪었지만 우물 안 개구리의 신세를 면한 후 우수성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 한국사람들에게는 다른 민족에 비해 좋지 않은 약점도 있지만 똑똑하고 열심히 일하여 성취하는 점에서는 타민족의 추종을 불허한다. 한국이 이처럼 짧은 기간에 경제적 발전을 이룬 것은 한국사람들의 우수성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지도층의 지도력이다. 흔히 정치가 문제라고 한다. 한국에서 정치 지도층은 거짓과 부정, 무능의 대명사처럼 되어 있다. 정치가 경제의 발목을 잡는다는 말은 더 이상 새로운 말이 아니다. 한국에서 정치만 잘 되면 선진대국으로 비상하지 못할 리도 없다. 정치 지도력의 정점은 대통령이기 때문에 정치가 잘못된 책임은 대통령에게 있다.

잔여 임기를 4개월쯤 남겨두고 있는 노무현 대통령의 요즘 행태를 보면 한심한 생각이 든다. 측근들을 단속 못해 온나라를 시끄럽게 하고 자신은 힘도 없으면서 차기 대선을 어떻게 해 보겠다는 생각인 모양이다. 느닷없이 남북 정상회담이란 카드를 내놓고 남북문제 해결을 위해 이 회담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영향력 증대에 이용하겠다는 속셈이 보인다.
이제 임기도 얼마 남지 않았다. 무엇을 어떻게 해 보겠다는 것인가. 남들처럼 퇴임 후 어떤 평가를 받게 될 것인지 생각해 볼 때가 되었다는 말이다. 그가 쓴 말대로 “깜도 안되는” 대통령이 자신의 사리사욕을 위해 국가와 민족의 앞길에 재를 뿌렸다는 역사적 평가는 받지 않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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