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100년 후의 자화상

2007-09-08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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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박(법학박사)

이제야 철이 들고 있는가 보다. 삶에 쫓겨 한 70여년을 도망치듯 살다 보니 어느새 들리는 인사말이 “요즘 건강하시지요?” “Hi, young man’ “Hi, Papi”로 바뀌는 것이 점점 뚜렷하게 자주 들린다. ‘아저씨’ ‘오빠’란 말은 아예 없어졌다. 이제는 ‘박 옹’ 혹은 ‘조상님’이라고 부를 때도 얼마 남지 않은 것 같다.

얼마 전, 집안에 무슨 날이라고 딸네 집에서 오라고 해 가본 적이 있었다. 아이들이 ‘하부지(할아버지를 두고 하는 말)’ 하며 나에게 다가와 포옹을 한다. 물론 그들의 엄마인 딸이 시켜서 억지로 한 것이다. 이를테면 팔만 감싸는 것이지 머리는 딴 데로 돌리면서 말이다. 그 애들은 포옹하던 팔을 빼자자 쏜살같이 자기들의 방으로 가버린다. 아마도 컴퓨터 게임을 하러 간 모양이다.


리빙룸 카우치에 누워 전에는 무심히 지나치던 벽에 걸린 그림들이 눈에 띈다. 헝가리 계통인 사위의 조상들의 사진들이다. 사위의 얘기로는 이 그림들이 한 100년 쯤 된 것이라고 한다. 그 얘기를 듣고 보니 즉시 100년 전의 그들의 조상들을 대면한 듯 싶고 그들에게 “내가 선생님의 6대 자손의 장인인 사돈이올시다”라고 마치 인사를 하는 것 같았다. 동시에 나는 100년 후 나의 자손들과 나와의 관계를 생각하게 되었다.

한 가지 틀림없는 것은 앞으로는 더 많은 물질문명이 발전해서 문명의 이기가 상상도 못할 정도로 편리하게 발전하고 또 새로 생길 것이라는 사실이다. 또 한 가지는 100년 전이나 100년 후나 인간은 살기 위해서 먹어야 하고 배설해야 하며, 종족의 번식을 위해 살아갈 것이며 수많은 종족들 사이에서 피나는 경쟁이 끊임없이 계속될 것이다. 그러나 먼 훗날 생존의 문제가 적어지거나 아주 없어지면, 그리고 자손 번식의 문제가 대단한 문제가 되지 않으면 인간 특유의 생존경쟁이나 과시 현상은 자연히 없어질 것이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삶의 본연인 과시의 즐거움을 잃고 있다. 동물의 본성인 싸워서 먹이를 구하고 다투어서 짝을 얻는 즐거움을 잃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대체로 가난한 사람들이 삶의 가치를 더 느끼며 잘 사는 사람들이 삶의 가치를 느끼지 못하여 자살인구가 늘어가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향락의 추구가 무한정인 인간의 욕망을 만족시킬 수 있을까? 그 묘약이 존재할 수가 있는 것인가? 또 설사 묘약이 존재한들 무한한 추구가 과연 가능하겠는가? 인류의 멸망론이 세기를 이어 들먹거린다.

종교적인 면, 환경적인 근거, 인구의 폭발, 전쟁, 혜성과의 충돌, 신종 질병, 컴퓨터의 역공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멸망의 가능성을 말해주고 있다. 여기에 확실하게 멸망론을 증폭시키는 것은 참새 머리밖에 안되는 인간의 속성인 향락에의 추구로 줄달음 칠 것이다. 그러나 지구는 결코 멸망하지 않을 것이다.아직도 많은 종교인들 가운데는 잠정적으로 병폐된 향락을 추구하는 대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서 구하는 기도 대신, 베푸는 기도로 환희를 얻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나도 늦게나마 주위에 베푸는 신앙인으로 보람된 삶을 살고 싶다. 100년 후 내 자손에게 나는 보람된 신앙인으로 열심히 살았노라고 당당하게 말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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