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녹차 한 잔을 마시며

2007-09-05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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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수(한민족포럼재단 사무국장)

어느새 9월, 여름의 끝자락은 온통 초록 물결이다. 하늘의 총총한 별들 조차 더욱 부드러워지고 있는 느낌이다.그 지겹던 여름의 끝이 못내 아쉬운 건 오는 가을이 유난히 빨라서일까.

아침 저녁으로 제법 시원한 바람을 실어나르는 가을이 성큼 우리 곁에 다가서고 있다. 오랜만에 여유를 갖고 청명한 가을 햇살 아래 녹차 한잔을 마시며 홀로 신성한 의식을 치르듯 이 가을을 맞는다.누군가 가을을 정리의 계절로 규정한다. 귀가 멍해지는 도심의 소음 속에서도 완전히 정지된
내면의 시간을 갖고 싶다. 옷에 달린 레이스 장식을 떼어내듯 생활과 마음에 불필요한 것들을 하나 둘 털어내는 그런 여유를 가지고 싶다. 소유한 물건이 많을수록 자꾸만 잃어버리는 것이 사람에 대한 따뜻한 정(情)이 아닐까.


여유로움 속에 차 한 모금이 진한 맛과 향으로 온 몸을 적신 뒤 입안을 감돌아 목젖을 타고 넘는 순간은 어떠한 감동보다도 짜릿하다. 차는 이렇게 내면의 자아와 현실의 나를 이어준다.찻잔을 홀짝일 때마다 내면의 순수한 자아와 부끄러운 현실이 작은 마찰을 일으키며 나를 괴롭히는 순간에 작은 깨달음이 있다.우리가 살아가야 할 이유를 알게 되고, 자신이 무의미하고 소모적인 존재가 아니라 무언가 도움이 될 수 있는 존재임을 깨닫게 되는 것은 외물(外物)에 대한 집착 대신 이렇게 한 잔의 차를 놓고 나를 성찰(省察)하게 하기 때문이다.

이 가을의 아늑한 햇살처럼 감겨오는 소중한 내 이웃에게 따스한 눈길을 돌려보자.가을은 허무의 계절이라 하여 삶이 공허하고 보잘 것 없어 보이더라도, 고독하고 무의미해 보이더라도, 대자연의 섭리에 대한 이해와 진리에 대한 확신, 배움에 대한 열정, 그리고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 찬 사람은 결코 패배하지 않으리라 생각한다.이국생활에서 나는 늘 두가지 생각 중에 사로잡혀 있다. 하나는 물질적 어려움에 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맑은 영혼에 대한 탐구다. 이 두 가지는 서로 공존할 수 밖에 없는 현실이 안타깝지만 나는 둘 다 사랑으로 품고 산다.

순식간에 왔다가 떠나버리는 가을처럼 우리의 삶도 긴 시간의 여정에 비하면 찰나에 불과하다.이 계절이 속절없이 가버리기 전에 찻잔처럼 푸르고 맑은 저 하늘과 아름다운 자연을 보자. 그리고 그것을 머리가 아닌 가슴에 담아 두자. 이 순간, 우리 안에 담긴 이 가을은 두번 다시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르거니까.

창밖으로 보이는 나뭇잎들이 자지러질듯 마지막 푸른 빛을 발하고 있다. 벌써 하늘에는 신성한 가을빛이 감돈다. 사형 집행장으로 끌려나온 도스토예프스키가 죽음을 5분 남겨두고 그 귀중한 시간 중에 1분간을 할애하고자 했다는 자연도 이제는 서서히 순명(順命)의 죽음을 준비하면서 우리가 어떻게 어려움을 극복하고 살아가야 하는가를 깨닫게 한다.자연이야말로 천천히, 단순하게, 선하게, 정직하게, 성실하게, 그리고 가장 인간답게 살아가는 법을 가르쳐 주는 위대한 스승인 것이다. 그러나 키워내고 거두고 마감하는 질서가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자연을 바라보는 나에겐 탄식처럼 가슴 속을 가로지르는 말이 있다.

“나는 올해 땀 흘려 키워낸 것이 없으니 거두어들일 것이 없구나, 그래서 이 가을을 맞이하기가 또 부끄럽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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