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칼럼/ “9월, 가을이다”

2007-09-01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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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욱(목회학박사)

9월이다. 가을이다. 세월이 화살처럼 지나간다. 지나가는 것은 세월이요 세월을 따라가는 것이 인생인 것 같다. 인생도 세월처럼 꿈같이 지나간다. 80, 90이 된 사람들. 지나간 세월을 어떻게 정리할까. 아마도 한 편의 ‘꿈’이라 정리할 수도 있겠다. 푹푹 찌든 여름날의 폭염. 이제는
사라지고, 아마도 한 번쯤 인디언 여름이 다가올 게다.

몇 날 전 전화 한 통을 받았다. 20여 년간 아는 지인이다. 오는 10월 중에 칠순(70) 잔치를 하려 한단다. “축하드린다”고 했다. 그러고 나서 가만 생각해 보니 “좀 잘못 말하지 않았나” 싶다. 나이 70이 되어 칠순잔치 하는 분에게 ‘축하’의 말은 조금은 이상한 듯 했다. 이럴 때는 어떻게 말을 해야 하나. “그동안 열심히 살아오셨습니다. 남은 생도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십시오.”


바람이 선선해졌다. 가을바람인가. 푸르던 잎들이 누런 색깔로 변하여 낙엽이 될 것. 김현승의 ‘가을의 기도’가 생각난다.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낙엽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겸허한 모국어로 나를 채우소서.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한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 가을에는 호올로 있게 하소서. 나의 영혼,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의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같이.” 기도하며 사랑하는, 모두의 가을이 된다면 더 좋으리라.

9월의 문턱에서 들려온 희소식. 탈레반에 잡혔던 인질 모두가 석방됐다. 모두 21명. 40여 일 만의 일이다. 안타깝게도 두 명은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 그 가족들에게 위안이 있기를. 한국정부의 노력에 박수를 보낸다. 돈을 주었건, 어떤 약속을 했건 그건 그리 중요하지 않다. 우주보다 더 귀한 21명의 생명이 다시 살아 가족의 품에 안길 수 있다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런 일이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 되겠다. 이번 일을 통해 반성할 것은 반성해야 한다. 테러리스트들과의 협상 불가 원칙이 깨졌다. 얼마의 돈이 몸값으로 오갔는지 모른다. 아마 수백억 원이 거래된 줄 안다. 우려되는 것은 전 세계의 테러리스트들이다. 한국인을 인질로 삼아 그들의 이익을 더욱 챙기려 할 것은 불을 보듯 눈에 보이기 때문이다.

세월이 가고 인생도 가지만 돈은 그대로 남아 있을 것 같다. 달아나려고 하는 돈을 잘 붙잡는 사람이 부자가 된다. 돈은 살아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생명과도 같은 가치를 갖고 있다. 이번 탈레반에 잡혔던 인질들 석방에도 돈은 아주 귀중한 역할로 몸값에 사용됐다. 사람에게만 필요한 줄 알았던 이 돈을 개에게 남겨준 사람이 있다. 한두 푼이 아닌 거액이다.
87세의 미국 할머니가 죽으며 남긴 일. 호텔의 여왕이라 불렸던 리오나 헴슬리. 14쪽 자리 유언장을 통해 1200만 달러(약 115억원)를 애완견에게 물려줬다. 그 개의 이름은 ‘트러블’. 이제 그 애완견의 이름은 ‘트러블’에서 ‘피스’로 바뀌어야겠다. 사람도 갖기 힘든 거액의 돈을 혼자 몽땅 차지했으니 이름도 좋게 달라져야겠지.

트러블에게 남겨진 액수는 지금까지 동물에게 남긴 유산의 최고액이 될 것이라 한다. 기네스북에도 오르겠지. 할머니는 남동생에게, 애완견을 죽을 때까지 돌봐주는 대가로 1000만 달러를 주었다. 또 할머니의 묘지 청소 등 관리 비용으로 300만 달러가 남겨졌다. 총 40여 억 달러의 재산을 가지고 있었던 헴슬리 할머니. 죽은 후, 그 돈은 다 무슨 소용이 있었겠나. 그러니 서민들로는 평생 만져보기도 힘든 거액의 돈을 사랑하던 애완견에게 남겨 줄만도 하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있다. “개가 어떻게 돈의 가치를 아냐”이다. 먹을 것과 잠잘 곳만 있으면 될 개다. 개에겐 거액의 돈도, 그 가치도 아무 소용이 없다. 남겨진 유산으로 즐거워할 개는 아니다. 오히려 자신을 사랑해주던 할머니가 보이지 않는 것만큼, 그 개의 관심을 끄는 것은 없을 것이다. 트러블을 죽을 때까지 잘 돌보아 주는 조건으로 1000만 달러를 받은 할머니의 동생이 얼마나 그 개를 사랑해 줄지가 의문이다.

금년도 거의 다 간 것 같다. 9월에 들어섰으니, 서늘한 바람 찬 서리로 바뀌면 겨울이다. 올해의 좋은 마감을 위해 지금부터 슬슬 한 해의 마무리 작업을 시작해 보는 것도 괜찮다. 화살처럼 지나치는 세월마냥 우리네 인생도 간다. 70된 지인이 칠순 잔치를 한다 하는데, 그를 알게 됐던 80년대 초가 엊그제 같다. 탈레반에 잡혀 생사를 가늠할 수 없었던 21명의 생명도 살아나, 9월은 더 의미가 있어 보인다. 애완견에게 1200만 달러를 주어 사람들을 놀라게 한 그 할머니. 좋은 일을 한 걸까? 김현승 시인의 말처럼 ‘기도하며 사랑하는 가을’이 되었으면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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