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살색 크레용

2007-09-04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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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병렬(교육가)

생각이 말을 낳는가, 아니면 말이 생각을 낳는가. 그것도 아니면 생각하면서 말을 하는가, 말하면서 생각하는가. 가끔 헷갈린다. 하여튼 우리는 생각도 하고 말도 한다. 왜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가. 그것은 어떤 말들이 고정관념을 만들어 우리를 옴짝달싹 못하게 하는 경우가 있기 때
문이다.

가령 이런 경우이다. ‘얼굴 색깔은 그게 아니지. 살색 크레용을 찾아봐’ 이 살색 크레용이 고정관념을 만든다는 것이다. 요즈음은 살색이 과일색깔로 이름이 바뀌었지만 전에는 ‘살색’이란 보통명사였다. 그래서 이 말이 부지부식간에 순혈주의, 단일민족, 인종적 우월주의의 바탕
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살색이란 한 가지 색으로 고정될 수 없지 않은가. 그리고 역사적으로 볼 때 한국사람에게도 다른 민족의 피가 섞이지 않았겠는가.


50년대 말 미국에 왔을 때 한국과 미국의 국력 차가 현저하였다. 그래서 어떻게 이런 국력 차가 생겼을까 하고 생각하다가 국가의 구성원을 눈여겨 보게 되었다. 잡다한 인종이 섞여 사는 미국과 비슷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한국, 과연 어느 쪽이 강한 국력을 가질 수 있을까. 이것이
하나의 의문이었다. 이어서 잡다한 인종이 다양한 국력을 창출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한국 안팎에서 성장하는 차세대들의 큰 차이는 무엇일까. 제일 큰 차이는 국제 감각이라고 생각한다. 미국에서 성장하는 자녀들이 가지는 가장 큰 혜택은 다민족과 함께 생활하는 것이라고
본다. 어렸을 때부터 다민족과 어울리면서 삶의 폭을 넓힐 수 있음은 다행한 일이다. 이런 현상은 세상을 보는 창문의 수효가 많아진다는 뜻이다. 창문의 수효가 많을수록 더 많은 색깔, 생각, 방법, 문화를 볼 수 있다. 이것이 개인과 사회, 나아가서 국가를 풍족하게 만드는 재산이 된
다. 그래서 다양성도 국력이라고 본다.

여기에 쐐기를 박는 말이 있다면 ‘우리끼리’일 것이다. 우리끼리는 우선 마음이 편하고 말 없이도 서로 통하는 사이다. 그렇다고 항상 우리끼리만 모여 놀거나 일한다면 새로움이 적게 된다. 새로움이 적으면 발전의 속도가 느리게 된다. 이렇게 되면 삶의 활기를 잃을 염려가 있
다.그러나 여럿이 어울리려면 조건이 있다. 각자의 뚜렷한 특색이 있어야 그룹에 공헌할 수 있다. 오래 전에 읽은 동화가 생각난다. 여러 동물들이 모여서 큰 잔치를 하고 재미있게 놀기로 하였다. 그래서 각자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 한 가지와 보여줄 재주 한 가지씩을 준비하기로 하였다.
이 모임은 성공리에 끝났다. 왜 그랬을까. 서로 다른 음식과 재주를 가지고 참가하였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고유의 문화를 전승해야 하는 이유이다. 아무 특징이 없는 친구, 전통문화가 없는 민족은 소속 단체에 대한 공헌도가 낮아 환영받지 못한다. 한 자리에 모인 사람들이 제각기 다른 문화의 특징을 가지고 있음은 그 그룹을 풍요롭게 만든다. 문화에는 우열이 없고, 서로 다름만이 존재한다는 것은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이게 ‘다름’의 아름다움이다. 여러 문화가 똑같지 않고 서로 다르기 때문에 삶의 색깔이 더 다채롭지 않은가.

어떤 고정관념은 문화 교류를 방해하는 높은 장벽이다. 보이지 않는 장벽은 보이는 그것보다 한층 더 높고 견고하다. 이 장벽은 유연한 마음의 열쇠로만 열 수 있다. 이 열쇠는 고정관념을 부수고 다른 문화를 즐기는 마음의 여유를 준다.또 고정관념을 형성하는 말들을 멀리하는 것도 현명한 방법이다. ‘남자는’ ‘여자는’ ‘젊은이는’ ‘연장자는’ ‘동양인은’ ‘서양인은’ ‘여름에는’ ‘겨울에는’ 등등을 비교하면서 다름의 아름다움을 보는 것이 아니라 두 가지의 우열을 따지려는 생리도 쉽게 고정관념을 만들기 쉽다. 고정관념은 나 자신과 그룹의 발전을 저해하는 주범이다. 단단한 생각의 틀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사유할 수 있는 즐거움을 누리는 것이 변화에 대처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누구하고 노나’의 노래말 중 ‘까치 까치 까치는 까치끼리만 놀지’를 ‘누구하고나 놀지요’로 바꾸는 노력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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